“주여,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노래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은 두 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는 회상, 기억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받은 사랑에 대한 회상, 기억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멍청하여 사랑을 현재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에 풍덩 빠져있는 연인인 아닌 한,
지나고 난 뒤에야 자신이 사랑 받았음을 깨닫거나 느끼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부모를 떠나보내고 난 뒤에야 그 사랑을 느끼고 그리워합니다.
말하자면 상실의 획득입니다.
잃으면서 얻는 것입니다.
소 잃고 난 뒤에 외양간 고치지 말라고 하지만
잃고 난 뒤에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랑은 회상이요 기억이고,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말씀도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것은 기억하는 것과 행하는 것입니다.
회상과 기억으로라도 당신 사랑에 대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버이 살아계실 때 섬기기를 다 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지라도 이제
회상과 기억으로라도 사랑에 대해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도 기억으로 되돌리기를 바라십니다.
헤어진 뒤 기억에서 완전히 잊히는 사람은 삶을 잘못 산 것이고
죽은 다음 기억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참 사랑이라면 절대로 잊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니 아직 살아계시지만 갈수록 어머니 사랑이 크게 느껴지고
전에 생각지 않던 것까지 사랑의 기억으로 생각납니다.
중학교 때입니다.
아주 더운 여름, 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며 가는데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에
한 아주머니가 채소를 가득 담은 다라를 이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여름 더위에 그 무거운 것을 이고 가시느라 얼굴이 빨갛습니다.
얼마나 힘드실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세히 보니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건강한 저는 책가방 하나 달랑 들고 버스를 타고 편히 가고
나이 드신 어머니는 그 무거운 것을 이고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푼을 아끼셔서 제 버스 차비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업고 다녀야 되는데
어머니가 저를 이고 다니신 셈이었습니다.
그 다음서부터 제가 20리 넘는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도저히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40년이 넘은 어머니의 사랑이 지금 기억에서 새롭고 또렷합니다.
이렇듯 성체와 성혈의 성사도
당신을 다 주신 이런 주님의 사랑을 기억함입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의 두 번째는 주님 사랑의 재현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오늘의 우리가 재현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재현할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십니다.
가끔 신문에 너무 마음이 아픈 사진이 실립니다.
젖도 안 나오는데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그렇게 멀리 있는 사람,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합니다.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먹이라는 말씀에 따르려는 자세만 있으면 되고
주님처럼 하늘을 우러러 기도드리면 됩니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철석같이 믿고
주님 사랑을 내가 대신 재현하려는 마음만 가지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며
우리는 먼저 내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새기고
다음으로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노래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은 두 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는 회상, 기억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받은 사랑에 대한 회상, 기억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멍청하여 사랑을 현재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에 풍덩 빠져있는 연인인 아닌 한,
지나고 난 뒤에야 자신이 사랑 받았음을 깨닫거나 느끼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부모를 떠나보내고 난 뒤에야 그 사랑을 느끼고 그리워합니다.
말하자면 상실의 획득입니다.
잃으면서 얻는 것입니다.
소 잃고 난 뒤에 외양간 고치지 말라고 하지만
잃고 난 뒤에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랑은 회상이요 기억이고,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말씀도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것은 기억하는 것과 행하는 것입니다.
회상과 기억으로라도 당신 사랑에 대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버이 살아계실 때 섬기기를 다 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지라도 이제
회상과 기억으로라도 사랑에 대해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도 기억으로 되돌리기를 바라십니다.
헤어진 뒤 기억에서 완전히 잊히는 사람은 삶을 잘못 산 것이고
죽은 다음 기억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참 사랑이라면 절대로 잊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니 아직 살아계시지만 갈수록 어머니 사랑이 크게 느껴지고
전에 생각지 않던 것까지 사랑의 기억으로 생각납니다.
중학교 때입니다.
아주 더운 여름, 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며 가는데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에
한 아주머니가 채소를 가득 담은 다라를 이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여름 더위에 그 무거운 것을 이고 가시느라 얼굴이 빨갛습니다.
얼마나 힘드실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세히 보니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건강한 저는 책가방 하나 달랑 들고 버스를 타고 편히 가고
나이 드신 어머니는 그 무거운 것을 이고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푼을 아끼셔서 제 버스 차비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업고 다녀야 되는데
어머니가 저를 이고 다니신 셈이었습니다.
그 다음서부터 제가 20리 넘는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도저히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40년이 넘은 어머니의 사랑이 지금 기억에서 새롭고 또렷합니다.
이렇듯 성체와 성혈의 성사도
당신을 다 주신 이런 주님의 사랑을 기억함입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의 두 번째는 주님 사랑의 재현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오늘의 우리가 재현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재현할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십니다.
가끔 신문에 너무 마음이 아픈 사진이 실립니다.
젖도 안 나오는데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그렇게 멀리 있는 사람,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합니다.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먹이라는 말씀에 따르려는 자세만 있으면 되고
주님처럼 하늘을 우러러 기도드리면 됩니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철석같이 믿고
주님 사랑을 내가 대신 재현하려는 마음만 가지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며
우리는 먼저 내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새기고
다음으로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만나지 못하는 한 주간 더욱 조화로운 시간 되세요.
사랑을 재현하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신부님 날마다 은총으로 가득찬 강론말씀 감사드립니다.^^
잘 다녀오셔요^^
오늘은 신부님의 어머님이 부러운 아침이예요^^
신부님의 어머니같은 희생을 두 아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살아와서
훗날 이 아이들이 엄마의 사랑을 무어라고 기억할지 걱정이되네요..
신부님! 성체와 성혈축일 축하드려요.
한주간 잘 지내시고 다음 주에 뵈요^^
자식이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부모님이 먼저 자식을 사랑하셨다는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기억 때문일 겁니다.
오늘도 영혼의 양식으로 오시는 주님을 마음 안에 모시면서
우리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그 사랑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계시고 과거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그분에 대한
존재와 부재를 기억하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