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수호천사는 길잡이>
오늘 독서도 그렇고 오늘 미사의 예물 기도도 그렇습니다.
“저희가 천사들의 보호로 현세의 모든 위험을 이겨내고,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그러니까 수호천사의 역할은 가는 길의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그럼으로써 안전하게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길을 가는 인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하였는데 정확합니다.
우리는 삶을 산다고 하는데,
사는 것이면서도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 같은데 사실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은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데, 산다+간다입니다.
다른 언어에서는 없는 아주 독특한 표현이고,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정신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큰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배 안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배는 어딘가를 향해 갑니다.
목적지를 향해 방향을 잘 잡으면 문제가 없는데
목적지가 없거나 방향을 잃으면 큰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천사가 길에서 우릴 지켜주는 것과
예물기도에서 위험에서 우릴 보호한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강도로부터 지켜주고 갖가지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길에서 벗어나거나 잘못된 길을 가는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환난이 없도록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겪게 되면 정신이 없게 되지요.
한 가지 어려움만 겪어도 우리는 그 어려움에 온통 사로잡히는데
설상가상, 어려움이 이어서 닥치면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길을 잃게 하는 것은 환난만이 아닙니다.
어떤 때 오히려 환난 없음이 우리를 길 잃게 하기도 합니다.
환난은 잠시 길을 잃게 하고 오히려 이내 정신을 차리게 하지만
쾌락은 우리를 아예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고,
중독성이 있어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약이나 주사로 치면 환난은 백신이요 괘락은 마약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런 경험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처음 얼마간은 비틀거리지만
마치 적을 맞이한 것처럼 어려움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고
이겨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게 하며 힘을 키우게 합니다.
반면 쾌락과 편안함은 우리 스스로 무너지게 하고
거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의 차입니다.
이렇게 환난이나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게 하는 것이 바로 천사, 수호천사입니다.
그런데 수호천사가 정말 그렇게 합니까?
수호천사가 그렇게 한다면 누구의 수호천사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다른 누구의 수호천사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왜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가고 어떤 사람은 잘 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수호천사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의 수호천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수호천사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내가 수호천사의 이끌음을 잘 따르면,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의 길을 잃지 않고 잘 갈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