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오늘 코린토서의 말씀은 위로의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바오로와 디모테오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환난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래서 감사드린다는 말씀입니다.
위로부터 위로를 받아 그 위로를 나누는 위로의 구조,
위로가 위로를 낳는 위로의 구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참된 위로와 참되게 위로받는 것에 대해 성찰을 합니다.
제가 오늘날 많이 경험하고 그래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자기 연민에 빠져있고,
그래서 위로를 받으려고만 하지 위로하려 하지 않는,
말하자면, <위로 이기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해달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위로 이기주의자가 된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얘기한 위로의 구조가 잘못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위로를 받아 위로를 나눠야 하는데
위로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고작 옆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하고 또 그런 위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옆 사람은 하느님처럼 위로의 존재가 못되고
나처럼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고 그러니 그가
설사 위로를 준다해도 그 위로로는 남은커녕 나도 충만케 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이
우리를 위로하시고도 넘칠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야지만
우리는 충분히 위로를 받고 그 위로로 남을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위로처럼 위로가 또한 격려가 되어야
남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음을 우리는 또한 봐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서간의 영어 번역은 위로라는 표현보다는
격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the Father of compassion
and the God of all encouragement"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지 온갖 환난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
같은 환난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동정심Compassion이 생겨서
우리도 우리가 받은 같은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
고작 옆의 위로를 받지 않고 위의 위로를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동시적이고 현재적인 행복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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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평화를 사랑할 뿐 아니라 이루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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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위로를 받고자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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