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영적 장애인.
어제는 서울에 올라가 어느 형제회 피정을 동반하였습니다.
끝내고 서울역까지 차를 태워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강의 때문에 많이 찔렸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찌르려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니
당신이 찔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 덕분에 내려오는 내내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했습니다.
분명 똑같은 저의 강의를 듣고 찔린 분이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찔리지 않은 분과 찔린 분 중에 누가 행복할까요?
당장은 찔리지 않은 분이 행복할 것입니다.
아니, 찔릴 때마다 상처만 받으시는 분보다는
아예 찔리지 않는 분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은 찔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가르치고
찔리지 않는 사람은 영적 장애인이기에 불행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요나의 설교에 마음이 찔려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이
아예 귀를 막고 듣지도 않고 꿈적도 않는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5시 기차를 탔습니다.
옆에 제 나이 또래의 자매가 앉게 되었는데 짐이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짐을 선반에 올려드렸는데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못 생겨서 그런가 곧 잠이 들어버립니다.
그에게 저는 없는 존재입니다.
기차가 떠나고 곧 한강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강을 지날 때마다 한강의 그 도도함과 충만을 기다렸다 보는데
어떤 사람은 그 강을 무심히 보고, 어떤 사람은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30분이 지나니 해가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황금 빛 노을이 황금 들판과 어울려 황홀했습니다.
그런데 기차 안 아무도 그 노을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노을의 은은한 빛도 싫은지 커튼으로 가렸습니다.
감각이 통하지 않는 것,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려 아무 내적 반응이 없는 것,
어쩌면 이것이 장애 중에 큰 장애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장애인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영적인 얘기에는 아예 무감각, 무반응인 존재지요.
자신의 돌 같은 무감각과 무반응을 해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는 그 무감각과 무반응을 깰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엄청난 기적이 아니면
자신의 그 단단한 영적 무감각은 깨지지 않을 거라고 고백하는 셈인데
주님은 요나의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요나처럼
죽었던 영적 감각이 다 살아나는 것이 어쩌면 회개이고,
그럴 때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하느님의 표징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창가에 스치는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창조주 하느님 사랑의 손길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영적 눈이 밝아져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께 찬미드립니다.
세상사 이미지로 받아들여 말로는 표현 못하지만 자연을 기뻐하는 아이들
앞에 이순간을 살지 못하는 굳어진 마음 깨닫게하심 하심 죽었던 감각 일깨우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