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의 축일에 우리가 듣는 독서와 복음은 둘 다
요한의 편지와 복음입니다.
요한은 오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고 애기함으로써
“하느님=사랑”, “하느님을 아는 것=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에 대한 그 뛰어난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한이 편지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했을 때
그 안다는 것이 머리로 아는 객관적인 정보의 습득이요,
사변적이고 지식적인 앎이었겠습니까?
부산에 사는, 아니 저기 아프리카 어디에 사는 누구를
소문으로 들어서 또는 신문을 보고 아는 것도 아는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보는 몇 가지 내 안에 들어와 있지만
나는 그를 만나지도 보지도 못했고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는 그로서 부산 또는 아프리카에 객관적으로 있고
나는 나로서 여기에 주관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아는 것 이상의 아무 의미 발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앎은 이런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입니다.
그 경험은 만나고 부대끼고 함께 울고 웃는 경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의 경험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면서
내 안에 사랑하는 이가 있고
사랑하는 이 안에 내가 있게 되어
점점 더 깊이 알게 되고
점점 더 넓게 알게 되고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마침내 존재로 상대의 전 존재를 알게 되고
존재의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어쩌면 동생 마리아와 사랑 경쟁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점점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그는 아는 것이고
예수님과 오빠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정체를 그는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사랑을 깊이 하게 되면
존재로 상대의 전 존재를 알게 된다고 하였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여도 전 존재를 다 알 수는 없지요.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존재라면 하느님이 아니시기 때문이고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그 큰 사랑에 어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사랑으로 그분이 사랑이심을 알 뿐이고
그 이상은 사랑을 바탕으로 믿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믿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그분을 나는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이제 나는 믿습니다.”
요한의 편지와 복음입니다.
요한은 오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고 애기함으로써
“하느님=사랑”, “하느님을 아는 것=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에 대한 그 뛰어난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한이 편지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했을 때
그 안다는 것이 머리로 아는 객관적인 정보의 습득이요,
사변적이고 지식적인 앎이었겠습니까?
부산에 사는, 아니 저기 아프리카 어디에 사는 누구를
소문으로 들어서 또는 신문을 보고 아는 것도 아는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보는 몇 가지 내 안에 들어와 있지만
나는 그를 만나지도 보지도 못했고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는 그로서 부산 또는 아프리카에 객관적으로 있고
나는 나로서 여기에 주관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아는 것 이상의 아무 의미 발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앎은 이런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입니다.
그 경험은 만나고 부대끼고 함께 울고 웃는 경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의 경험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면서
내 안에 사랑하는 이가 있고
사랑하는 이 안에 내가 있게 되어
점점 더 깊이 알게 되고
점점 더 넓게 알게 되고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마침내 존재로 상대의 전 존재를 알게 되고
존재의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어쩌면 동생 마리아와 사랑 경쟁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점점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그는 아는 것이고
예수님과 오빠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정체를 그는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사랑을 깊이 하게 되면
존재로 상대의 전 존재를 알게 된다고 하였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여도 전 존재를 다 알 수는 없지요.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존재라면 하느님이 아니시기 때문이고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그 큰 사랑에 어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사랑으로 그분이 사랑이심을 알 뿐이고
그 이상은 사랑을 바탕으로 믿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믿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그분을 나는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이제 나는 믿습니다.”
그 이상은 사랑을 바탕으로 믿을 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는다면....
출애굽기의 하느님을 직접 뵙게 해달라는 모세의 기도에서처럼,
하느님의 전 존재를 지금 살아서 직접뵌다면 ....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에 보여주시기는 하되 뒷모습의 부분만, 그것도 잠깐만 보여주셨음은 모세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이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느님은 신성이 강조된 분이시고
신약에서의 예수그리스도는 신성을 감추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신 분으로서 인성이 강조된 분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이시며,
오늘의 하느님께서는 신성인성을 모두 감추시는 하느님이심을 저의 신앙고백으로 삼아봅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믿고 알아뵙는 모세나 신약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인물들,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보고난 후 믿게된 혹은 주님의 부활을 강하게 체험한 사도들,
그리고 그 이후의 교조와 교부시대로 이어져 전수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인들,
오늘의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성서와 성전을 통해 그리고 현실의 삶에서 다양한 삶의 조건을 살아가는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교회안에서, 사랑을 느끼며 사랑을 주고받을수 있음이 하느님의 사랑때문이기에 나도 그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합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내가 할수 있는만큼만, 부담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부단히 사랑을 실천한다면 더욱 큰 사랑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이다."
'가장 보 잘것 없는 이 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하느님) 에게 해 준 것이다'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 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합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의 밑바닥에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심리적인 결핍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지요.
그 만큼 인간은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김길태를 탓할 수 없는 것도 그가 좋은 부모로부터 좋은 기질과
충분한 사랑을 받고 성장했다면 그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가!
그러니 내가 좋은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한다면 사랑의 결핍으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환경적인 어머니가 되어 주어야 함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믿는 사람의 삶의 태도이며 소명이다 싶습니다.
그런 오늘을 살도록 마음을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