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공생활 이전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서 지혜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도에 유학을 갔다는 얘깁니다.
이 얘기대로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 수행을 통해 그루가 되고
그리고 이제 막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쳤다면
고향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의아해 하고 심지어 못마땅해 합니다.
이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인도에 가지도 않았고
어떤 유명한 랍비나 예언자 밑에서 수학한 것도 아니었나봅니다.
그렇다면 고향 사람들의 태도는 이해할 만합니다.
특별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특별한 양성이나 수행을 받지 않았다면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출중한 지혜와 기적의 힘을 이해하기 어렵고
더욱이 그것을 인정하며 축하하기는 쉽지 않지요.
나와 같이 ‘야야’ 하며 지내고 ‘이놈저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높은 직위에 오르면
인격적 성숙에 따라 같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친구도 있지만
친구가 그렇게 된 것이 못마땅해 하는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출세를 시기질투하지 않더라도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적인 변화도 인격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못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 즉 신적인 면모를 보임에 대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못마땅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 또는 인간적 성숙 이상의 성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대단한 성숙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즉시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성숙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많은 사람, 보통 사람들은 그 원인을 자기 잘못에서 찾거나,
그러기 싫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방해에서 찾습니다.
자기든 남이든 인간적인 차원에서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깊은 눈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섭리를 찾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뜻이 좌절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좌절에는 하느님의 크신 뜻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즉시 우리의 눈을 높은 곳으로 돌려야 합니다.
눈에는 殘像이 있게 마련이지요.
먼저 본 모습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고
심지어 다른 것을 보고 있는데도 계속 남아있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잔상 말고
심리적 잔상, 의식적 잔상, 관념의 잔상도 있습니다.
누구에 대해 한 번 박힌 상이나 관념이 잘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고정 관념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계속 남아있어
순순히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변화에도 적용이 된다면
앞서 보았듯이 그 변화가 분명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데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잔상의 이런 작용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업적들을 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날이 은총을 입는 길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공생활 이전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서 지혜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도에 유학을 갔다는 얘깁니다.
이 얘기대로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 수행을 통해 그루가 되고
그리고 이제 막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쳤다면
고향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의아해 하고 심지어 못마땅해 합니다.
이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인도에 가지도 않았고
어떤 유명한 랍비나 예언자 밑에서 수학한 것도 아니었나봅니다.
그렇다면 고향 사람들의 태도는 이해할 만합니다.
특별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특별한 양성이나 수행을 받지 않았다면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출중한 지혜와 기적의 힘을 이해하기 어렵고
더욱이 그것을 인정하며 축하하기는 쉽지 않지요.
나와 같이 ‘야야’ 하며 지내고 ‘이놈저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높은 직위에 오르면
인격적 성숙에 따라 같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친구도 있지만
친구가 그렇게 된 것이 못마땅해 하는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출세를 시기질투하지 않더라도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적인 변화도 인격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못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 즉 신적인 면모를 보임에 대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못마땅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 또는 인간적 성숙 이상의 성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대단한 성숙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즉시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성숙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많은 사람, 보통 사람들은 그 원인을 자기 잘못에서 찾거나,
그러기 싫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방해에서 찾습니다.
자기든 남이든 인간적인 차원에서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깊은 눈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섭리를 찾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뜻이 좌절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좌절에는 하느님의 크신 뜻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즉시 우리의 눈을 높은 곳으로 돌려야 합니다.
눈에는 殘像이 있게 마련이지요.
먼저 본 모습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고
심지어 다른 것을 보고 있는데도 계속 남아있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잔상 말고
심리적 잔상, 의식적 잔상, 관념의 잔상도 있습니다.
누구에 대해 한 번 박힌 상이나 관념이 잘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고정 관념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계속 남아있어
순순히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변화에도 적용이 된다면
앞서 보았듯이 그 변화가 분명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데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잔상의 이런 작용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업적들을 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날이 은총을 입는 길입니다.
그저 사랑의 눈으로 만 바라 보겠습니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나의 경험에서 나온
해석일 수 있는데 그것이 마치 진리인양 거침없이
말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갑자기 부끄러워지네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경험했느냐에 따라 실체는
달리 해석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하며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눈, 투명한 눈을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마음을 닦는 마음공부를 오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오늘 다시 해봅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업적들을 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날이 은총을 입는 길입니다.“라고 저도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