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하고 묻는
성전 세 거두는 이들에게 베드로가 “내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오래 성당에 나가지 않던 신자를 면담한 적이 있는데,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된 이유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분이 다니던 성당에 신축을 하게 되었을 때
하필이면 그 때 그분 가족 경제 사정이 너무 나빠져
신축 기금을 하나도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죄스러워 교회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 이후 저는 교회에서 돈 얘기하는 것이 죄스러워졌습니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헌금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은 더 진짜 이유는
가난한 분들의 없는 돈 내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은 돈을 내시는데
저는 수도자라고 하여 한 푼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그분들의 도움으로 사는 제가 가난하게 살지 않는 것이
너무 뻔뻔스럽고 파렴치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금을 걷어 들이는 세상 임금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세금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를 빌어
하느님의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금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봉헌된 가난을 사는가?
봉헌된 정결을 사는가?
봉헌된 순종을 사는가?
나의 의지와 소유한 것 모두를 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헌하고
오로지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가?
그렇게 나를 다 봉헌하였다면 프란치스코처럼
세금을 내지 않고 얻어먹고 살지라도 당당해도 좋을 것입니다.
수도규칙에서 그는 동냥을 청하는 자세에 대해 얘기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 뿐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 주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권리입니다.
그리고 동냥을 얻는데 수고하는 형제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동냥을 주는 사람에게도 큰 보상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지닐 수 있다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전 세 거두는 이들에게 베드로가 “내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오래 성당에 나가지 않던 신자를 면담한 적이 있는데,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된 이유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분이 다니던 성당에 신축을 하게 되었을 때
하필이면 그 때 그분 가족 경제 사정이 너무 나빠져
신축 기금을 하나도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죄스러워 교회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 이후 저는 교회에서 돈 얘기하는 것이 죄스러워졌습니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헌금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은 더 진짜 이유는
가난한 분들의 없는 돈 내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은 돈을 내시는데
저는 수도자라고 하여 한 푼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그분들의 도움으로 사는 제가 가난하게 살지 않는 것이
너무 뻔뻔스럽고 파렴치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금을 걷어 들이는 세상 임금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세금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를 빌어
하느님의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금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봉헌된 가난을 사는가?
봉헌된 정결을 사는가?
봉헌된 순종을 사는가?
나의 의지와 소유한 것 모두를 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헌하고
오로지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가?
그렇게 나를 다 봉헌하였다면 프란치스코처럼
세금을 내지 않고 얻어먹고 살지라도 당당해도 좋을 것입니다.
수도규칙에서 그는 동냥을 청하는 자세에 대해 얘기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 뿐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 주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권리입니다.
그리고 동냥을 얻는데 수고하는 형제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동냥을 주는 사람에게도 큰 보상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지닐 수 있다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작은 것을 실행 합니다.
알면서도 그리 살지 못한다는 것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지네요.
누가 누구를 지적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돌아보면 누구나 다 느끼는 아픔일 겁니다.
그래서 또 나와 같은 ‘너’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