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말이 저에게는
“주님과 먹고 마시기만 하였다.”는 말로 들립니다.
또 이렇게도 들립니다.
“미사에는 참례하여 성체만 모셨다.”
그러니까 이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과 먹고 마시기만 하고 주님과 함께 수난의 길은 가지 않으며
성체만 모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실천하지 않았다.”
이것은 누구 한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물론이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주님의 첫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깁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주님과 최후 만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수난의 현장에는 아무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구원 받을 사람이 많지 않겠지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좁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구원의 문이 좁은 이유는
대학에 정원이 있듯이 천국에 정원이 있어서 좁은 게 아닙니다.
곧 하느님께서 구원 받을 사람을 제한하셔서 좁은 게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사랑의 문이기 때문에 좁은 것입니다.
사랑의 문이라!
그런데 사랑의 문이 왜 좁을까?
노래마다 사랑 타령이고,
어느 누구도 사랑을 마다하지 않는데.
그렇습니다.
사랑은 누구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흔히 얘기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고, 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저도 사랑하고 싶고, 이 세상사람 누구나 진정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인들과 같이 특별한 사람은 그리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하고 싶어도 못하기에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사랑 못하는 이유가 사랑이 십자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식탁에 있을 때에는 정말 사랑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포도주에 있을 때에도 사랑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단풍에 있을 때에도 사랑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맛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먹고 싶고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저절로 생각납니다.
그러니 하고 싶고 그래서 저절로 하게 되는 사랑이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해야 하기에 사랑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너를 위한 것이라면
싫은 것이 싫지 않은 사랑이 되어야
괴로움이 더 이상 괴로움이 되지 않는 사랑이 되어야 사랑할 수 있으니,
사랑의 문은 분명 좁은 문이다!
사랑의 문이 좁은 문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누구도.
희생, 봉사 , 절제가 있는 십자가 사랑에서
진정 사랑의 기쁨을 느껴 봅니다.
어제는 교회에서 일하는 자매 한 분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해가며 강한 어조로 자신들의 문제를 저에게 전가하는 아주 황당한 경우를 당했습니다. 물론 진실을 밝혀졌지만 그 일을 해결하고 마무리해줘야 하는 입장에서 약간의 싫은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없지 않아서 일처리에 약간 아주 약간^^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싫은 것이 싫지 않은 사랑이 되어야”하는 말씀이 저의 부족함을 바라보게 하고 또한 그로인해 제 안에 머물던 악취도 녹아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