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과부가 가진 것을 다 넣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소유물을 다 바쳤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바치는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전부를 내어주는 과부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과부의 사랑은 마음을 다 하는 사랑이고,
다른 마음, 갈림이 없는 사랑이며,
위선이 없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에 비해 율법학자나 부자들은
가진 것의 지극히 작은 일부를 헌금하였을 뿐 아니라
헌금과 마음, 헌금과 사랑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갈립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듯
이들의 헌금은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향하고,
사람들에 대한 체면치례이지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속마음과 겉 행위가 다른 것인데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정치인들의 웃음.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은 상인들의 친절도 이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웃음과 친절은 호의나 사랑이 아니라
표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마음은 표와 돈을 얻는 것입니다.
표를 얻고 물건을 팔고나면 더 이상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나도 남는 사람이 없습니다.
북한의 가요 중에 <심장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이고 그래서
북한에 갈 때나 새터민들을 만나 노래를 부를 때 자주 부르는 노래인데
그 가사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은가?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그런 사람, 나는 못잊어.”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이 있고, 수없이 많이 만나도
마음에 남는 사람 없을 수 있고
한 번 만나도 마음에 남는 사람이 있는데
만남에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마음에 남지요.
프란치스코는 성가를 부르는 것과 관련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목소리의 음률보다는 마음의 일치에 관심을 두어,
하느님 앞에서 열심히 성무일도를 바치게끔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목소리는 마음과, 마음은 하느님과 일치시키고,
목소리를 곱게 내어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보다는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도록 하십시오.”
목소리에 마음이 있고, 마음에 하느님이 있으니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 노래에 하느님이 있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하느님을 발생합니다.
노래만이 아닙니다.
무슨 행위든 그 행위에 마음을 담고
마음에 하느님을 담으면 행위는 사랑이 되고 하느님을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과부가 가진 것을 다 넣은 것을 바꿔 얘기하면
자신을 위해 남겨놓는 것 아무 것도 없이 모두를 톡톡 털어 넣는 것인데
그것은 소유물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향과 마음까지 쏟아 넣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는 얘기합니다.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외모 보다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 참 사람합니다.
두 마음 아닌 오직 한마음 주님께 드려지기를 ~~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