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많은 여인이 용서를 받는 오늘 루카복음의 얘기는
다른 복음들과 다릅니다.
우선 다른 복음들은 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의 사건으로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루카복음은 공생활 초기의 사건이고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가 아니라 가파르나움 어디이고
시몬이라는 사람도 마태오와 마르코에서는 나환자로 나오는데
루카복음에서는 바리사이로 나옵니다.
그러니 옥합을 깨트려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바른 것은 같지만
이 얘기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가 다릅니다.
다른 복음들에서 여인은 그저 한 여인이거나
마르타와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루카복음에서처럼 이름난 죄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른 복음의 여인들은
죽음을 앞 둔 예수께 사랑을 드린 여인들이었지만
루카복음의 죄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의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더 유익한 쓰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지만
루카복음에서는 향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께서 불결한 죄녀와 상종을 한다고 비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루카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또 드러납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죄인은 벌 받아 마땅하고 멀리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데 비해
예수님만은 죄를 씻음으로 죄인이 용서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죄를 씻되 스스로 씻으라고 다른 사람들은 요구만 하는데 비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씻게 하여주십니다.
지난 여름 전철을 탔는데 제가 자리에 앉으니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저를 피해 슬쩍 자릴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몸에서 땀 냄새가 나나, 음식 냄새가 나나 신경이 쓰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서운하면서도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사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그렇게 즉시 내색을 하나 하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서울역에 갈 때 노숙자들을 피해갔던 제가 부끄럽고
제가 나이 먹어 몸에서 냄새가 더 많이 나면,
사람들이 피하고 찾아오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제도 매주 가는 노인 시설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의 몸에서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코가 묻은 아이의 코를 씻어주는 어미와 할머니의 마음이
왜 노숙자와 노인에게는 잘 들지 않는 것일까?
왜 아이의 코는 더러워도 예쁜데 어른의 코는 그렇지 않을까?
죄보다 더 큰 사랑이 있어야 죄를 씻어주고 죄인을 용서할 수 있듯이
어른보다 훨씬 더 큰 어른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근자에 이렇게 옹졸했던 마음이 확장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의 아주 작은 잘못까지도 사사건건 시비 거는 마음이 들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요구를 속으로 하던 저였습니다.
그러다 지난 주일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묵상을 하다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옹졸해진 저를 발견하고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형제들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형제들 뒷바라지 해야지
씻으라고 요구하지 말고 씻어줘야지 이렇게 마음을 바꾸니
내가 씻어줄 수 없을 정도로 컸던 잘못이 작은 잘못으로 바뀌고
마치 할머니가 손자 코 씻어주듯이 씻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제가 씻어주는 것이 아니고
저는 그냥 사랑할 뿐입니다.
왜냐면 사랑을 받는 사람이 스스로 씻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더 사랑 받기 위해서
스스로 씻고 더 나아가 화장까지 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 하지요.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씻지 않고
덕으로 단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죄녀는
주님 사랑의 멱을 감고 자기 죄 씻었음을
옥합을 깨트리고
그 비싼 향유로 예수님 발 씻음으로 드러내며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고
씻김을 씻어드림으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들과 다릅니다.
우선 다른 복음들은 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의 사건으로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루카복음은 공생활 초기의 사건이고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가 아니라 가파르나움 어디이고
시몬이라는 사람도 마태오와 마르코에서는 나환자로 나오는데
루카복음에서는 바리사이로 나옵니다.
그러니 옥합을 깨트려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바른 것은 같지만
이 얘기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가 다릅니다.
다른 복음들에서 여인은 그저 한 여인이거나
마르타와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루카복음에서처럼 이름난 죄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른 복음의 여인들은
죽음을 앞 둔 예수께 사랑을 드린 여인들이었지만
루카복음의 죄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의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더 유익한 쓰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지만
루카복음에서는 향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께서 불결한 죄녀와 상종을 한다고 비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루카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또 드러납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죄인은 벌 받아 마땅하고 멀리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데 비해
예수님만은 죄를 씻음으로 죄인이 용서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죄를 씻되 스스로 씻으라고 다른 사람들은 요구만 하는데 비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씻게 하여주십니다.
지난 여름 전철을 탔는데 제가 자리에 앉으니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저를 피해 슬쩍 자릴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몸에서 땀 냄새가 나나, 음식 냄새가 나나 신경이 쓰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서운하면서도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사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그렇게 즉시 내색을 하나 하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서울역에 갈 때 노숙자들을 피해갔던 제가 부끄럽고
제가 나이 먹어 몸에서 냄새가 더 많이 나면,
사람들이 피하고 찾아오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제도 매주 가는 노인 시설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의 몸에서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코가 묻은 아이의 코를 씻어주는 어미와 할머니의 마음이
왜 노숙자와 노인에게는 잘 들지 않는 것일까?
왜 아이의 코는 더러워도 예쁜데 어른의 코는 그렇지 않을까?
죄보다 더 큰 사랑이 있어야 죄를 씻어주고 죄인을 용서할 수 있듯이
어른보다 훨씬 더 큰 어른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근자에 이렇게 옹졸했던 마음이 확장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의 아주 작은 잘못까지도 사사건건 시비 거는 마음이 들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요구를 속으로 하던 저였습니다.
그러다 지난 주일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묵상을 하다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옹졸해진 저를 발견하고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형제들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형제들 뒷바라지 해야지
씻으라고 요구하지 말고 씻어줘야지 이렇게 마음을 바꾸니
내가 씻어줄 수 없을 정도로 컸던 잘못이 작은 잘못으로 바뀌고
마치 할머니가 손자 코 씻어주듯이 씻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제가 씻어주는 것이 아니고
저는 그냥 사랑할 뿐입니다.
왜냐면 사랑을 받는 사람이 스스로 씻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더 사랑 받기 위해서
스스로 씻고 더 나아가 화장까지 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 하지요.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씻지 않고
덕으로 단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죄녀는
주님 사랑의 멱을 감고 자기 죄 씻었음을
옥합을 깨트리고
그 비싼 향유로 예수님 발 씻음으로 드러내며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고
씻김을 씻어드림으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가을 하늘처럼 맑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으니
이제라도 열씸히 사랑 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