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어디서 힘을 얻어 이런 일을 하는가?”
이 의문의 말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들을 보며 내뱉은 말입니다.
제가 한국 순교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드는 의문도 같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00여 년의 박해 동안
우리의 순교자가 2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특별한 사람들 몇이 아니고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놀라움과 함께 의문이 듭니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그 힘이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얘기합니다.
너무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렇게 얘기하고 넘어갑니다.
그렇게 쉽게 넘어가거나 지나쳐도 되는 것인지,
이번에는 이런 생각에 잠시 머물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힘이 나왔다고 하며
너무 쉽게 넘어가고 가볍게 지나쳐 감,
바로 이것이 우리가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모든 힘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1)나는 왜 그 힘을 받지 못했는지,
아니 왜 그 힘을 받으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이 우선되고,
2)다음으로 그 힘을 내가 받아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먹는 것이 필요하고,
3)다음으로 마음을 먹은 대로 삶과 존재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4)다음으로 그런 삶과 존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여러 단계를 나열하였지만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이고 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노력과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이렇게 표현했지만
이것을 기도와 관상적인 표현으로 바꿔 얘기하면
반성 또는 성찰은 하느님 은총의 조명이요,
마음을 먹음은 은총에 마음을 여는 것이요,
삶과 존재를 바꿈은 입맛이 바뀌어 하느님 사랑에 맛 들이는 것이며
삶과 존재 상태를 유지함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씀하시듯
기도와 헌신의 정신, 또는 기도와 헌신의 영을 지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기도의 정신 또는 기도의 영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대해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우리의 영을 지니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철수와 영희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음이 헌신의 정신 또는 헌신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인 나의 영은 이제 헌신코자 합니다.
사랑을 받아들인 나의 사랑은 이제 전부를 바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처럼
“주여,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하고 기도하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기도한 대로 자기 전부를, 목숨 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순교 성월과 프란치스코 축제의 기간을 같이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과 프란치스코를
시간과 공간을 넘어 관통했던 그 기도와 헌신의 영을
우리는
갈망하고
청하여
지니도록 하십시다.
이 의문의 말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들을 보며 내뱉은 말입니다.
제가 한국 순교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드는 의문도 같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00여 년의 박해 동안
우리의 순교자가 2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특별한 사람들 몇이 아니고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놀라움과 함께 의문이 듭니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그 힘이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얘기합니다.
너무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렇게 얘기하고 넘어갑니다.
그렇게 쉽게 넘어가거나 지나쳐도 되는 것인지,
이번에는 이런 생각에 잠시 머물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힘이 나왔다고 하며
너무 쉽게 넘어가고 가볍게 지나쳐 감,
바로 이것이 우리가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모든 힘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1)나는 왜 그 힘을 받지 못했는지,
아니 왜 그 힘을 받으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이 우선되고,
2)다음으로 그 힘을 내가 받아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먹는 것이 필요하고,
3)다음으로 마음을 먹은 대로 삶과 존재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4)다음으로 그런 삶과 존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여러 단계를 나열하였지만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이고 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노력과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이렇게 표현했지만
이것을 기도와 관상적인 표현으로 바꿔 얘기하면
반성 또는 성찰은 하느님 은총의 조명이요,
마음을 먹음은 은총에 마음을 여는 것이요,
삶과 존재를 바꿈은 입맛이 바뀌어 하느님 사랑에 맛 들이는 것이며
삶과 존재 상태를 유지함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씀하시듯
기도와 헌신의 정신, 또는 기도와 헌신의 영을 지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기도의 정신 또는 기도의 영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대해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우리의 영을 지니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철수와 영희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음이 헌신의 정신 또는 헌신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인 나의 영은 이제 헌신코자 합니다.
사랑을 받아들인 나의 사랑은 이제 전부를 바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처럼
“주여,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하고 기도하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기도한 대로 자기 전부를, 목숨 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순교 성월과 프란치스코 축제의 기간을 같이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과 프란치스코를
시간과 공간을 넘어 관통했던 그 기도와 헌신의 영을
우리는
갈망하고
청하여
지니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