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구원을 바라는 인간의 몫이 있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 편의 몫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바라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도 지당하여 하나마나한 말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구원이 이루어지려면 우리 인간이 구원을 먼저 바라야지요.
그런데 구원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구원은 행복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행복하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겠다고 하고,
출세해서 행복하겠다고 하며,
도를 닦아 행복하겠다고 하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겠다고 하며,
아무튼 하느님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꿈꾸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바라는 사람은 하느님 구원으로 행복하려는 사람이고,
오늘 복음의 맹인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맹인은 구원을 바랄 뿐 아니라
구원에 대한 크나큰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사람들이 나무라는데도 잠자코 있을 수 없었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외쳐댑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가 이렇게 큰 갈망을 가진 것은
아마 그가 보다가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예 볼 수 없었던 태생소경이라면 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불행케 하는 것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볼 수 있다가 지금 볼 수 없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자비를 원하는지 물으시는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청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때문이지요.
능력과 자비의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인데,
그것은 그가 믿음이 출중한 사람이기 때문인 측면도 있지만
주님이 그에게 믿음을 주는 분이기 때문이지요.
복음을 보면 믿음과 관련하여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
믿음이 약한 사람,
믿음이 강한 사람.
복음에서 딱 한 군데 믿음을 달라고 청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하며 청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고 꾸짖으시자,
그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예 믿음을 청하지 않을 것이고,
믿음을 강한 사람은 청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믿음을 주십사고 청하는 것인데,
그렇게 청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믿음을 주십니다.
저는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믿음을 주는 분,
오직 우리 주 하느님만이 믿음을 주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