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며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바랐건만
너의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한탄하시는데,
여러분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언지 아십니까?
어렵게 또 복잡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그리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비를 걸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시비를 걸지 않는데
시비를 걸어오기에 싸우게 된다고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비에 말려들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이렇게 시비를 걸지도 않고 시비에 말려들지도 않는 분들,
그래서 자신이 평화로울 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지혜롭고도 훌륭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편입니까?
시비를 걸지 않는 것과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여러분은 더 쉽습니까?
시비를 거는 편입니까, 시비에 말려드는 편입니까?
호전적인 사람이 아닌 한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는 시비를 거는 편이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시비를 걸어오기에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제가 돈 때문에 누구에게 싸움을 걸지 않고,
권력 때문에 누구에게 먼저 시비를 걸지 않지만
저는 수없이 많은 시비를 사람들에게 걸고 있습니다.
어제는 형제들과 함께 차를 타고 장례 미사에 가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안내가 쉴 새 없이 종알종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저 혼자 다닐 때는 그게 싫어서 아주 끄고 다니는데
형제들은 그것이 시끄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때 “쟤는 왜 저렇게 말이 많지?”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저를 보고서 혼자 픽 웃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내비게이션의 여자에게도 시비를 걸고,
껌을 씹는 사람에게도 시비를 걸고,
옷차림 때문에도 시비를 걸고,
이념지향 때문에는 부지기수로 시비를 걸곤 합니다.
다 “왜 저래?” 하며 시비를 거는 것이고,
다 자기중심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하시듯 하느님의 의와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시비 걸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와 다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을 틀리다고 말하곤 하는데
무의식으로 나와 다른 것을 틀려먹었다고 판단을 하는 것이며
이 자기중심적 판단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임재하심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시비 걸지 않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시비를 거는 것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 아니 계신 표시일 것입니다.
적어도 많이 알고 있는 저 자신 내가 아는 모든것
십자가의 사랑으로 판단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