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잘못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잠을 깨니 설핏 허무감이 감돌면서
헛살았다, 잘못 살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실>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는데
곧 이어지는 것은 <머물다>, <잠기다>였습니다.
어디에 머물고 무엇에 잠긴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어딘가에 머물고 싶었고 잠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머물고 싶은 것은 떠돌기 때문이겠지요.
떠돌다보면 어딘가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고,
젊은 날에 여기저기 많이 떠돌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어딘가에 머물고 싶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건가요?
일생 수도원에서 살았는데
제가 어딜 떠돌아 다녔기에 머물고 싶다는 건가요?
그러니 제가 오늘 머물고 싶고, 잠기고픈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닐 겁니다.
천상여정이었다면 허무감이나 헛살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 들 것이고
어딘가 머물고 싶고, 잠기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지상의 방랑자였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이 일 저 일, 이 사람 저 사람을
많이 기웃거리며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습니다.
제 딴에는 사랑이 소중하기에 그만큼 사랑도 하고
그 사랑도 하느님 사랑이 되게 하고자 애쓰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랑하지만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 밖에서 사랑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추운 겨울 밤,
집 없이 떠돌던 나그네가
페치카를 때며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는 사랑가족을
창문너머로 들여다보면서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과 같겠지요.
제가 어딘가에 머물고 싶고, 잠기고 싶었던 곳은
하느님이고,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얼마간 하느님 사랑 밖에서 떨고 있었고
사랑 없으면서도 사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느님 사랑에 머물고 싶은 것이고
하느님 사랑에 잠겨 배터리가 충전되듯 사랑으로 충만되고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안드레아도 어쩌면 방랑자였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 구원자 메시아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스승 세례자 요한을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초대 덕분에 그분 계신 곳에 머물며 하루를 지냅니다.
그 시간은 오후 네 시.
하루 종일 떠돌다가 날이 저물 녘 네 시가 되어서야
그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과 함께 하루를 머뭅니다.
하루 종일 싸돌아다니던 우리.
우리도 이제 오후 네 시가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