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 사도신경의 첫 마디가 “전능하신 천주 성부”이잖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전능하지 않은 분은 결단코 신도 아니고,
그러니 능력의 주님을 믿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지요.
그러므로 제게는 능력의 주님을 믿는 것보다
사랑의 주님을 믿는 게 더 귀해 보입니다.
하실 수 있는 주님보다 하실 주님을 믿는 게 더 귀하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능력의 주님을 믿는 것은 그저 믿음일 뿐이지만
사랑의 주님을 믿는 것은 믿음+사랑이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 거요,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악마적인 힘을 믿기는 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악마적인 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뿐이며,
믿는다 하더라도 그의 힘을 믿을 뿐 인격을 믿는 게 아닙니다.
지난 몇 년, 사랑 없이 권력을 휘두른 우리 정치 지도자들을 봤습니다.
국민이 준 권한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르고
국민을 섬기라고 국민이 준 권한을 가지고
국민을 사찰하고 국민을 억누른 그 악행들을 충분히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돈 남 말할 처지가 못 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섬기는 사랑을 하지 않으면 그들과 마찬가집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를 섬기지 않고 내 입맛에 맞는 그이기를 바라고,
심지어 내 입맛에 맞는 그이기를 요구한다면
칼만 안 든 강도라고 얘기하듯 저도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어제 새벽 눈을 뜨니 또 다시 허무감이 저를 엄습하였습니다.
그래서 왜 또 허무감이 왔을까 생각해보니
그제 밤 눈 보기를 피했던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제 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데 눈 덮인 앞뜰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 얼른 제 방으로 들어 와버렸습니다.
그 깨끗함과 그 아름다움을 보기에 저는 합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너무도 깨끗한 눈이 너무도 더러운 제 죄를 보게 하기에
제 죄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눈은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이었고,
저는 제 죄로 인해 하느님이신 그 눈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는데
그것은 눈이 꼴불견이어서가 아니라
제 눈(目)에 눈(雪)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눈으로 내려오셨는데도 저는 뵙기를 꺼렸던 것인데,
허무감 덕분에 어제 아침 묵상 시간,
사랑의 사람이 아니라 힘의 사람으로 살아온 저의 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죄를 보게 하고 겸손하게 만든 하느님이신 눈을
어제 아침에는 제 방 창문을 통하여 황홀하게 바라보고,
눈꽃이 핀 나무를 눈이 아니라 마음에 새겼습니다.
눈雪이 눈目을 통해 마음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손이 맹인의 눈에 닿아 눈을 여신 것처럼
하느님이신 눈이 닫혔던 제 눈을 열어
눈이신 하느님을 보고 영접케 하셨습니다.
눈이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눈처럼 내려오시는 하느님은 이 대림절에 찬미 받으소서!
Thank you !
열매를 맛본다.감사 합니다, 숨쉬게 하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