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안타까움의 토로입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의 대표적인 토로가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입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안타까움은 '알면 좋을 텐데’
'아는 대로 하면 좋을 텐데'하는 느낌입니다.
알면 좋은데 모르는 것이 안타깝고,
모르면 배우면 좋을 텐데 배우려고 들지 않음이 안타깝고,
잘 되기를 바라는 그가 잘못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겁니다.
그러니까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미워하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안타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하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잘못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뭇소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과
사랑의 사람만이 안타까워 하고 충고도 하는 건데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할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런 사람은
충고해주는 그의 지혜와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껏 얘기해줬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 없는 사람은 분노하고 그를 포기해버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안타깝고 그런 그가 불쌍합니다.
그렇지만 불쌍해도 어쩔 수 없는데
이 '어쩔 수 없음'이 또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 말도 듣지 않고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어린애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어린애는 물론 말 잘 듣는 어린이가 아니지요.
아주 미성숙하기만 한 아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은 죽어라고 듣지 않고 떼만 쓰는 아이이며
지혜로운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말로 오늘 당신 말씀의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그러니 성숙한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식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도 배우고
같이 먹고 마시는 주님에게서도 배우겠지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에게나 배우는 사람입니까?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까?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줏대에 대한 성찰)
http://www.ofmkorea.org/391630
19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어리석음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서)
http://www.ofmkorea.org/298223
18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철부지 아이와 하늘 아이)
http://www.ofmkorea.org/175085
17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장단은 사랑이고 목적은 구원인 하느님의 장단)
http://www.ofmkorea.org/115491
16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 가운데 사는 나?)
http://www.ofmkorea.org/96499
15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어떤 말도 듣지 않는 미성숙)
http://www.ofmkorea.org/85034
14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우리 세대는, 우리 공동체는?)
http://www.ofmkorea.org/72799
13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장터의 어린이같은 마음)
http://www.ofmkorea.org/58449
12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어울려서 춤추고 노래하자!)
http://www.ofmkorea.org/45720
11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행복절연)
http://www.ofmkorea.org/5420
09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아니 형제")
http://www.ofmkorea.org/3390
08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부정의 메커니즘)
http://www.ofmkorea.org/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