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이 말씀은 지금도 그 감동이 생생합니다.
제가 처음 부산의 본당에 있을 때 매일 복음을 묵상하고
수녀원에 가서 미사 강론을 하였는데,
그때 이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가슴 벅찼던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대단하고 벅찬 사실입니까?
이것은 이전에
제가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러
가방 만드는 공장에도 가고
난지도 쓰레기장에도 가고
넝마주의자들에게도 가고
야학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갔던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고
그 후에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은든소로 가거나
산과 들로 가거나
선방으로 가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로 가게 했던
가르침이었고
깨달음이었고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들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봉쇄 관상 수녀원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은 여기에만 계신다고 누가 얘기한다면
거기에만 계시기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만 만나지는 하느님은 저기서는 못 만나지요.
하느님은 여기와 저기, 장소에 매이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장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의 하느님이고 관계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너와 나’입니다.
‘나와 그’가 아니고 ‘너와 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among) 계시는 하느님은
너와 나 안에(within) 계시고
너와 나 사이에(between) 계시고
너와 나 가운데(in the midst) 계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이신 하느님은 다른 어디에 계시지 않고
무엇보다 우리 각자 안에 계시며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사랑으로 계시며
우리 사랑의 한 가운데 중심으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이미 내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서로 안에서 만납니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이 말씀은 지금도 그 감동이 생생합니다.
제가 처음 부산의 본당에 있을 때 매일 복음을 묵상하고
수녀원에 가서 미사 강론을 하였는데,
그때 이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가슴 벅찼던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대단하고 벅찬 사실입니까?
이것은 이전에
제가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러
가방 만드는 공장에도 가고
난지도 쓰레기장에도 가고
넝마주의자들에게도 가고
야학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갔던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고
그 후에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은든소로 가거나
산과 들로 가거나
선방으로 가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로 가게 했던
가르침이었고
깨달음이었고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들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물론 봉쇄 관상 수녀원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은 여기에만 계신다고 누가 얘기한다면
거기에만 계시기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만 만나지는 하느님은 저기서는 못 만나지요.
하느님은 여기와 저기, 장소에 매이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장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의 하느님이고 관계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너와 나’입니다.
‘나와 그’가 아니고 ‘너와 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among) 계시는 하느님은
너와 나 안에(within) 계시고
너와 나 사이에(between) 계시고
너와 나 가운데(in the midst) 계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이신 하느님은 다른 어디에 계시지 않고
무엇보다 우리 각자 안에 계시며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사랑으로 계시며
우리 사랑의 한 가운데 중심으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이미 내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서로 안에서 만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환경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사람임을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관계적 존재라고 하는가 봅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하는 것이고,
어디서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삶에서 얼마든지 경험한다 싶습니다.
볼 수 없는 하느님을 굳이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너’와 ‘나’사이에 사랑이 존재하면
하느님이 함께 계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
‘너’와 ‘나’ 사이에 분열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선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그래서 인간적인 제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이시지만
뜬구름 잡듯 믿지 않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너‘와 ’내‘가 “우리’로 만나는 복된 날이 되기를 청해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