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어제 저는 회개의 세례와 복음의 세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 씻음, 정화의 세례이고 사랑의 세례임도 말씀드렸습니다.
어제 세례로 공생활 준비를 마치신 주님께서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이 회개와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복음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은 그 뜻이 어렵지 않은데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그 뜻이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식대로 한 번 그 뜻을 이해해봅니다.
아마 그것은 복음이 현세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그뿐 아니라 내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원하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쉬었다면 참으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수도자가 수도원마다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제 경험을 놓고 보더라도
복음의 행복론은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믿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저의 20대 때 적지 않게 저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러나
지금은 그 내용이 가물가물한 책이 에릭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입니다.
그래서 제 식대로 이 책의 내용을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존재를 소유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소유에서 자유로워짐으로 우리는 존재를 존재로 만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존재는 자유로워진다.
그러니까 존재에서 존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을 떼어내는 것이다.
부자富者에서 부를 떼어내는 것이다.
식자識者에서 식을 떼어내는 것이다.
미인美人에서 미를 떼어내는 것이다.
권력자權力者에서 권력을 떼어내는 것이다.
기술자, 기능인에서 기술과 기능을 떼어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을 때 우리는 존재를 사랑한다.
<소유냐 존재냐> 얘기는 그래서 결국 <좋아하나 사랑하나>의 얘기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을 소유한 삶이 행복할 것이라고 대다수가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은 결국 존재가 소유의 노예가 되어 부자유하다.
좋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나든 남이든 그리고 하느님이든
그것을 소유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사랑하는 것,
이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제 생각에 이것이 바로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소유해야 행복하겠다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유를 버려야 행복할 수 있다는 복음의 얘기는,
사랑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복음의 얘기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그것을 믿고 실천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이해해야 믿고 믿어야 실천하는 것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