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곤란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자신있게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작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작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에 비교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저는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분명 사랑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사랑하냐고 물으면 팔을 둥그렇게 그리며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답하는 아이들에 비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크기를 알기에 그렇게 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처럼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아시고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아십니다.
주님의 물으심은 과거적 사랑 그러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사랑이 아니라
미래적 사랑 그러니까 지금부터 앞으로 사랑하겠냐고,
곧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겁니다.
이것은 고백 성사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은 모르시기에 실토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아심에도 뉘우치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고.
그리고 당신을 위해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양 떼를 위해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며
결국 당신께 대한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양 떼를 사랑하고 잘 돌보겠는지 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부탁하십니다.
이는 마치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먼저 죽으면서
아이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내가 아이들을 잘 돌보지 않을까 봐 염려하여 부탁하는것이
아니라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을 세 번 물으신 것은
세 번 배반한 것에 대해 세 번의 사랑 고백을 요구하신 측면도 있지만
이제 당신 대신 그리고 당신 없이 당신 양들을 돌봐야하는 베드로의 고통을
헤아리며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마음 다지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죽어야 할 베드로의 베드로의 미래를 예언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베드로도 그렇고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분을 따르게 마련이지만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분의 십자가 길까지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대답을 자신있게 할 수 없는 우리지만
우리의 사랑과 약함까지 아시는 주님을 믿고서 사랑의 고백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