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퍼득 떠오른 말이 바로 배후와 혐의입니다.
배후란 벌어진 어떤 일을 보고 그 일이 그 사람이 한 것이라기엔
너무 큰일거나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때 곧
혐의가 있을 때 그 사람 뒤에 있다고 생각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혐의가 있을 때 유능한 수사관은 그 배후를 캐냅니다.
그런데 배후를 캐내는 것은 의심스러운 안 좋은 일뿐 아니라
우리 신앙인의 경우 영적인 면에서도 그 배후를 캐야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일의 <영적인 배후>를 캐는 것인데
꽃이 피면 그 꽃의 배후에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고,
꽃의 아름다움에서 그 배후의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얘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암흑세계의 지배자인 마귀와의 관계에서는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선하신 하느님의 매우 밝은 표상으로 보았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피조물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는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진 모든 작품 안에서 즐거워하였고,
유쾌한 사물들의 배후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이성과 원인을 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피조물을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더더욱 그렇게 봐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 영적 배후인
하느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렇게 보는 데 실패하고
다른 피조물은 그 배후의 하느님을 보면서도
인간은 그렇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내게 파견한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보낸 인간이 아니라 어떻게 뚝 떨어져
내 앞에 있게 된 인간, 꼴보기 싫은 인간,
장점은 하나도 없고 단점만 보이는 인간, 죄만 보이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배후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도 그렇게 보는데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믿지 않아 어둠속에 있는 사람에게,
어둠속에 있기에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니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배후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뒤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일컬어
혜안慧眼 곧 지혜의 눈이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제3의 눈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뒤의 것이 아니라 배후의 하느님을 볼줄 아는 눈을
믿음의 눈 또는 영안靈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 안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보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보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