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고 하시며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주님의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살던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기는 했고,
주님의 새 계명을 모르는 사람도 서로 사랑하기는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너희는 율법에서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그렇습니다.
원수가 아닌 사람끼리는 누구나 서로 사랑합니다.
문제는 주님의 새 계명을 배우기 전에는 원수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방인들도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잘해준다는 주님 말씀처럼
나한테 잘해줘야만 원수가 안 되는데 대댜수가 나한테 잘해주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들도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되받을 생각으로 사랑을 했는데
많은 경우 되받지 못하거나 원하는만큼 되받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가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원수가 아니라 이처럼 서로 사랑하다가 원수가 되었는데
한마디로 서로 바라는 사랑을 했기에 서로 사랑하다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바라는 사랑,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에 머물거나 받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사랑을 하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을 살고자 하는 우리는
"너희는 이웃에게 등대지 말고 하느님께 바라라"는 말씀처럼
인간에게 등을 기대면 그 사랑은 이웃 때문에 무너질 것이니
바라기는 하늘 바라기를 할 것이고, 하기는 내리 사랑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바라고 이웃에게 바라는 것이 없을 때 원수가 없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원수였던 사람까지 이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랑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사랑에 따라 살게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하고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고도 하는데
신천지는 죽어서 가는 곳이거나 다른 어디가 아니고,
지금, 여기 주님의 사랑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부럽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부러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는 요한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계명을 받은 오늘 우리는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시작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조선족 동포 공동체와 함께 성모의 밤과 피정을 하기 위해
홍천 '여기 피정의 집'에 와 있는 바람에 묵상을 충분히 못하고
강론을 올렸습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