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공교롭게도 사도들이 큰 풍랑 때문에 겁을 내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듣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복음은 우리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배저어 갈 때도
세상으로부터 큰 도전을 받고 인간적으로는 크게 흔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때일수록 하느님께 믿음을 둬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약한 믿음 때문에 제자들이 풍랑에 겁을 내고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고
베드로 사도도 틀림없이 예외가 아니었을 터인데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를 세운다고 하십니다.
약한 믿음은 반석과는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처음부터 교회의 반석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차츰 교회의 반석이 되어간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차츰 교회의 반석이 되어갔을까 이것이 요점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흔들리면서 반석이 되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약하기에 흔들리지만
흔들림으로 인해 믿음이 단단해졌다는 역설입니다.
물론 흔들림으로 인해 믿음이 아예 뿌리채 뽑힐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그는 자기 입으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자기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확 죽어버렸습니다.
너무도 힘없이 죽어버렸고 속절없이 그리고 부질없이 죽어버렸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믿음이 뿌리채 뽑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없이 그리고 속절없이 죽어버리셨다는 것은 맞지만
부질없이 죽어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부질없다는 것이 지금은 쓸데없이 공연히 한 짓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대장간에서 불질이 없으면 담금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질을 하고 물질을 해야 담금질이 되는 것입니다.
불질로 뜨겁게 했던 쇠를 물질로 차갑게 식히지 않으면 담금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불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있어야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그렇고 우리의 믿음도 그런데,
믿음의 좌절이 바로 믿음의 담금질이고 하느님의 담금질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었으니 주님의 죽으심과 그로 인한 제자들의 신앙 좌절은
부활 신앙을 위한 담금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믿음의 좌절이 문제가 아니라
좌절 다음에 믿음이 다시 불타오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질과 물질에 이어 또 불질과 물질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신앙을
다시 타오르게 하시고 이 체험을 통해 부활 신앙의 근간을 형성해주셨으며
그래서 후에 또 좌절을 겪을 지라도 다시 불질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신앙을 키워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반석과 기둥이 되어준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축일을 특별히 기리며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담금질하기로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