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에는 자주 사자들의 세계가 나옵니다.
새로운 수사자가 등장을 하면
이전 수사자의 새끼들은 이 새 수사자에 의해 다 죽임을 당합니다.
자기 새끼가 아닌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자기의 피만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양을 하듯이 내가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들이지만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여자에게 아이가 달려있다면 자기 아이를 낳지 않거나
상처하고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할 경우 자기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를 더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덜 사랑할까봐,
그러니까 남의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
아예 자기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한 자매는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을 한 이유가 그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고
어미 없는 아이가 불쌍해서,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 때문에 그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피임에 실패하여 임신을 하였고
열심한 신자인 그는 그 아이를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낳았습니다.
그런데 훌륭히 두 아들을 키운 그 자매님이 이제 와서
작은 아들 때문에 마음 아려합니다.
자기가 낳지 않은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할까봐
일부러 작은 아들을 무심히 키웠던 것이 이제 와서 가슴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입각한 이 자매님의 의로운 사랑인 것이지요.
예수님에게 다른 형제가 없었을까?
마리아의 동정성과 관련하여 개신교와 자주 다투게 되는 것이 이것인데
이는 복음 여러 곳에 예수의 형제라는 표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성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오늘 성 요셉 축일을 지내니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자식을 낳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양부로서만 일생 살았을까?
만일 개신교가 얘기하듯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만 동정이 아니라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라면 요셉도 평생 동정이고,
예수님 때문에 다른 자식은 없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는 바람에 자기 아들은 없는 것이고,
성 요셉의 의로움이란 이런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이 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나의 자녀로 삼는 것.
내가 낳은 지금의 내 아들을 내 아이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로 봉헌하는 것도 그 하나이고,
내가 낳지 않은 아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내가 받아들이는 것,
말하자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입양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내 아이든 입양한 아이든 하느님의 아들로 키워내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성 요셉을 본받아야 할 것일 겁니다.
새로운 수사자가 등장을 하면
이전 수사자의 새끼들은 이 새 수사자에 의해 다 죽임을 당합니다.
자기 새끼가 아닌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자기의 피만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양을 하듯이 내가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들이지만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여자에게 아이가 달려있다면 자기 아이를 낳지 않거나
상처하고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할 경우 자기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를 더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덜 사랑할까봐,
그러니까 남의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
아예 자기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한 자매는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을 한 이유가 그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고
어미 없는 아이가 불쌍해서,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 때문에 그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피임에 실패하여 임신을 하였고
열심한 신자인 그는 그 아이를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낳았습니다.
그런데 훌륭히 두 아들을 키운 그 자매님이 이제 와서
작은 아들 때문에 마음 아려합니다.
자기가 낳지 않은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할까봐
일부러 작은 아들을 무심히 키웠던 것이 이제 와서 가슴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입각한 이 자매님의 의로운 사랑인 것이지요.
예수님에게 다른 형제가 없었을까?
마리아의 동정성과 관련하여 개신교와 자주 다투게 되는 것이 이것인데
이는 복음 여러 곳에 예수의 형제라는 표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성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오늘 성 요셉 축일을 지내니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자식을 낳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양부로서만 일생 살았을까?
만일 개신교가 얘기하듯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만 동정이 아니라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라면 요셉도 평생 동정이고,
예수님 때문에 다른 자식은 없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는 바람에 자기 아들은 없는 것이고,
성 요셉의 의로움이란 이런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이 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나의 자녀로 삼는 것.
내가 낳은 지금의 내 아들을 내 아이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로 봉헌하는 것도 그 하나이고,
내가 낳지 않은 아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내가 받아들이는 것,
말하자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입양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내 아이든 입양한 아이든 하느님의 아들로 키워내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성 요셉을 본받아야 할 것일 겁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명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