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제게 이 말씀은 가장 짧아도 가장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하나도 빠지지 말고 당신께 오라는 말씀이고,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를 하시면 사람들이 다 갈까? 이런 묵상을 해봤습니다.
고생도 모르고 짐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렇겠지요?
고생을 모르는 사람,
무거운 짐을 다 남에게 지우는 사람은 주님께 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고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몸 고생이 없으면 마음고생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몸 고생이든 마음고생이든 고생스러울 때
그리고 지고 있는 짐이 너무도 무거울 때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찾아가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 신자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사람이 고생스럽고
책임이나 인생의 무게가 무거워 위안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
주님께 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인간에게 가서 인간의 위안과 조언을 받고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점쟁이한테 가서 점쟁이의 위안이나 조언을 받습니다.
세례 받았지만 성당에 나오지 않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아마 그런 사람들일 겁니다.
주님께 가서 위안을 받았거나 받는다면 왜 냉담하겠습니까?
앞에서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찾아가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했는데
사실 고생스러울 때 위를 보지 않고 옆을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에겐 그만큼 위를 쳐다보는 것이 쉽지 않고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바로 위로의 말을 내 귀에 들려줄 사람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수없이 벌을 받으면서도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것이 뭣 때문이겠습니까?
하느님은 멀고 사람들은 가깝기 때문이 아닙니까?
문제는 인간이 안식을 주고 인간이 만든 것이 답을 주느냐 그것입니다.
안식을 주길 바라는 그도 위안을 바라기에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안식과 위로를 필요로 하기에
인간이 위로를 줄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이 위로를 주지 못하면 실망하고,
위로를 주지 않으면 섭섭하거나 더 나아가 밉거나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리석지 않으려면 이럴 때라도 위로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옆이 아니라 위로 방향을 바꾸고 차제에 위로받는 방식도 바꿔야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을 달라고 말만 하지 말고 들려주시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때 당신이 옆에 있으니 두려워말고 안심하라고도 하시지만
어떤 때는 오늘처럼 안식 법 그러니까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스승처럼
주님은 안식을 주지 않고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고생을 없애주시지 않고 고생 중에도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고,
짐을 덜어주시지 않고 짐을 편하고 가볍게 지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멍에 곧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의 멍에입니다.
그것으로 짐을 지면 그리 고생스럽지도 않고 그리 무겁지도 않다는데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믿고서 그 멍에로 짐을 져 보시겠습니까?
제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어제 강론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수녀원 컴퓨터로 강론을 올렸는데
컴퓨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분간 강론 못 올릴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