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이 제가 하는 여기 밥상에 대해서 알고 계시고,
많은 분이 실제로 여기 밥상을 이용해주셨습니다.
이 밥상은 생일이나 축일 등 중요한 날에 제가
육신의 식탁도 차려드리고 영적인 식탁인 미사도 드려드리는 개념인데
제가 이것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오래전이고 오늘 복음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주인과 종의 얘기는 주인을 깨어 기다린 종에게
주인이 손수 식탁을 차려주시고 시중을 드신다는 얘깁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다른 복음에서는 아무리 일을 힘들게 했을지라도 주인은 종에게 쉬라고 하지 않고
주인을 위해 식탁을 차리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함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이 보통의 주인과 종의 관계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그 반대로 하신다니
실제로 이렇게 되면 종은 너무도 행복하고 다른 한편 너무도 황송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여기 밥상도 이런 황송한 행복을 누리는 분도 있지만
너무 부담스럽고 편치 않아 이용하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종의 이런 행복한 관계가 우리와 주님 사이에 맺어져야 하고,
우리는 주님의 이런 황송한 사랑에 황송한 행복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복음적인 관계가 우리 사이에도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은 행복한 집사에 대해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집사도 주인에게는 종이지만, 주인 대신 종들을 관리하는 종입니다.
그러니 주인에게는 밑에 있지만, 종들에게는 위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종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시중을 든다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너희도 서로 발을 주라고 하신 것처럼
집사인 우리도 서로 상을 차려주고 시중들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지혜롭고 충성스러우며 그렇게 할 때 행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정체성, 집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인데
부끄럽게도 저는 집사건 종이건 종의 정체성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순간 저는 그분의 종이 되기 때문이고,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 뜻대로 되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다가 삼십을 넘어 사십을 향해 가며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을 먹고 노력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력한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니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저는 하느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내 뜻대로 하려고 하기에 하느님 뜻을 거스르고,
내 맘대로 하려고 하거나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에 이웃에게 함부로 합니다.
어제도 선교협동조합 월례회 미사를 하고 미사 참석자들과 식사를 즐겁게 했는데
주방에 들어가니 주방 도구들이 어지러웠고 그래서 순간 화까지 나지는 않았지만
저의 정신이 어지럽고 짜증 비슷한 것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기껏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집사에 대해 강론하고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 때문에 주변에 감정 폭력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불충한 종처럼 술 취해 이웃을 때리는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지만
화나 짜증 같은 감정 폭력은 가하곤 하는데 이게 다 자기 뜻대로 하려 하거나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공자가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고 육십에 그 하늘의 뜻에 순응하게 되며,
칠십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게 돼야 한다고 하였고,
프란치스코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육십을 넘어 칠십을 향해 가는 제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렇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될 수 있을지 한탄하며 뉘우치는 오늘 새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