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죽일 감사송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칭송합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니까 6월 24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이 이 감사송 내용 가운데에서
선구자 요한이 태어날 때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음을 기념하는 축일이라면
오늘 축일은 이 감사송의 내용 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선구자로서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세례자의 죽음은
주님을 증언하다 죽은 것 같이 보이지 않고,
헤로데의 불륜을 고발하다가 헤로디아에 의해 허망하게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는 주님을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저 인간적으로 한 인간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듯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러니까 인간적인 사랑으로 충고도 하고
인간적인 정의감으로 질책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바른 소리를 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인간적으로 입바른 소리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늘 축일의 의미이고 감사송의 의미입니다.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은 바른 소리인데
그것이 사랑 때문에 하는 것과 정의감 때문에 하는 것의 차이가 있듯이
하느님 생각하며 하는 것과 그저 인간적으로 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를 위해서는, 나에 대한 불의가 아닌 한, 반대할 이유가 없고,
불이익과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반대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며 실제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내게 저촉되지 않는 한 침묵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죽음은 주님 때문에 그리고 진리이신 주님을 위해
불의를 고발하다가 박해를 받아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구자의 평행 이론과 같습니다.
요한이 주님의 선구자라면 주님의 운명과 다를 수 없고,
주님보다 앞서 박해와 수난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한이 우리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지내는 것도 불편하며
우리는 요한처럼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니,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강변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처럼 주님을 위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강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주님의 선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라고 발뺌은 할지라도
주님의 추종자인 것에서 발뺌할 수는 없고,
주님의 선구자는 아닐지라도 다른 누구의 선구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
이 축일을 지내며 차라리 사랑이 없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