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말, 말, 말.
듣기 좋은 말.
듣기 싫은 말.
그저 그런 말.
말, 말, 말.
마음에 남는 말.
상처로 남는 말.
아무 것도 아닌 말.
지금도 제가 보람으로 여기는 일 중의 하나가
20여 년 전 프란치스칸 가족 수련자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임을 시작할 때 처음 하는 것이기에 많은 신경을 썼고,
당연히 힘도 많이 들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다음 모임을 위해 평가회를 가졌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았다고, 수고했다고 만족감을 표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수고한 보람이 있다고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있는데
우리 형제가 맨 마지막에 부족했던 점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 한 마디만 없었다면 Perfect, 대만족인데......
얘기하더라도 처음에 하던지, 아니면 중간에라도 하지
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해서 그 좋았던 기분을 망친단 말인가...
우리 형제가 너무 서운하고 밉고,
앞에 좋았던 기분은 다 날라 가고 상처만 남았습니다.
잠 잘 자는 제가 잠도 안 오고 아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일어 나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니
안 좋다는 말 한 마디에 수없는 칭찬이 날라 간 이유가 있엇습니다.
바로 저의 교만, 완벽한 칭찬을 바란 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형제도 좋지 않아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좋았지만 너무 좋은 얘기 일색이어서
형제인 자기라도 안 좋은 점 하나는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말이 남습니다.
듣기 좋은 말과 듣기 싫은 말입니다.
그런데 듣기 싫은 말이 좋은 말보다 더 강하게 그리고 오래 남습니다.
좋은 말은 들을 때는 좋지만 이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안 좋은 말은 상처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되는 이유가 바로 좋은 말만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독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어떻게 보면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하느님 말만 하는 것이며,
모독의 말은 듣지 않고 긍정의 말만 하는 것입니다.
모욕을 받을 때 얼굴 빛 차돌처럼 변치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드리라고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그 모욕 때문에 큰 영예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모독을 하건,
어떤 모독을 하건,
모독은 받는 사람이 받아야지 받는 것입니다.
줘도 안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받고 싶지 않은데도 모욕을 받는다는 것은
누가 모욕을 주어서가 아니라
받고 싶지 않아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적 이유 때문입니다.
몸이 허약하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병에 걸리고 싶지 않은데도 걸리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의 영으로 강건하지 않으면 악령이 침범하듯,
하느님의 말씀으로 강건하지 않아
모욕의 말에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요?
그럴 때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닌 말이 되고
오직 인간의 말만 위로가 되건 상처가 되건 남는 말이 될 것입니다.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말, 말, 말.
듣기 좋은 말.
듣기 싫은 말.
그저 그런 말.
말, 말, 말.
마음에 남는 말.
상처로 남는 말.
아무 것도 아닌 말.
지금도 제가 보람으로 여기는 일 중의 하나가
20여 년 전 프란치스칸 가족 수련자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임을 시작할 때 처음 하는 것이기에 많은 신경을 썼고,
당연히 힘도 많이 들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다음 모임을 위해 평가회를 가졌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았다고, 수고했다고 만족감을 표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수고한 보람이 있다고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있는데
우리 형제가 맨 마지막에 부족했던 점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 한 마디만 없었다면 Perfect, 대만족인데......
얘기하더라도 처음에 하던지, 아니면 중간에라도 하지
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해서 그 좋았던 기분을 망친단 말인가...
우리 형제가 너무 서운하고 밉고,
앞에 좋았던 기분은 다 날라 가고 상처만 남았습니다.
잠 잘 자는 제가 잠도 안 오고 아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일어 나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니
안 좋다는 말 한 마디에 수없는 칭찬이 날라 간 이유가 있엇습니다.
바로 저의 교만, 완벽한 칭찬을 바란 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형제도 좋지 않아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좋았지만 너무 좋은 얘기 일색이어서
형제인 자기라도 안 좋은 점 하나는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말이 남습니다.
듣기 좋은 말과 듣기 싫은 말입니다.
그런데 듣기 싫은 말이 좋은 말보다 더 강하게 그리고 오래 남습니다.
좋은 말은 들을 때는 좋지만 이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안 좋은 말은 상처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되는 이유가 바로 좋은 말만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독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어떻게 보면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하느님 말만 하는 것이며,
모독의 말은 듣지 않고 긍정의 말만 하는 것입니다.
모욕을 받을 때 얼굴 빛 차돌처럼 변치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드리라고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그 모욕 때문에 큰 영예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모독을 하건,
어떤 모독을 하건,
모독은 받는 사람이 받아야지 받는 것입니다.
줘도 안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받고 싶지 않은데도 모욕을 받는다는 것은
누가 모욕을 주어서가 아니라
받고 싶지 않아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적 이유 때문입니다.
몸이 허약하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병에 걸리고 싶지 않은데도 걸리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의 영으로 강건하지 않으면 악령이 침범하듯,
하느님의 말씀으로 강건하지 않아
모욕의 말에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요?
그럴 때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닌 말이 되고
오직 인간의 말만 위로가 되건 상처가 되건 남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요, 우리 주님의 말씀 뿐 입니다.
신앙인이라 자처하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들 마음이 옹졸한지..
남을 인정하고 칭찬하기보다는 남을 비난하고 험집을 낼때가 많습니다.
신앙있는 척하는 어떤 사람의 한마디가 내내 가슴에 지워지지않은걸 자신은 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