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라’는 번역이 과연 잘 된 번역일까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이 번역은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즐기라’는 것이 퇴폐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의미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번역보다 앞선 공동번역성서를 보면 사실 오해를 살만한 면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즐기라는 말이 영어로 ‘Rejoice’라고 하고, 개신교 번역에서는
‘즐거워하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환호하라’, ‘크게 기뻐하라’,
‘크게 즐거워하라’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에서 쾌락주의도 나쁜 것이 아닌데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얘기하는 쾌락은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오히려 절제하고 어떤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곧 아타락시아의 경지이며, 고통의 부재 또는 고통의 극복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비관주의적이거나
고통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이 얼마나 불행입니까?
더 쉽게 얘기하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때 유행했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든 즐겁게 살려는 ‘태도’입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라는
저의 행복론과도 통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제가 무조건 행복하려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행복이 조건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되겠다는 저의 의지이고 태도지요.
가난하면 불행하고 부유하면 행복하다면 그것은
돈에 좌우되는 행복이라는 것이고, 그만큼 불완전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코헬렛서는 근심에 머물지 말고,
고통에만 머물지 말라는 뜻으로 이렇게 얘기하지요.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그러니 더 큰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근심과 고통이 마음 안에 머물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수난과 십자가의 길에는 발을 내딛지도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