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공동체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애초부터 쉽지 않고
그래서 애써야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애쓰라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리 애쓰지 않고 일치를 이루려고 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조금 애쓰다가 일치점을 찾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기에
바오로 사도는 조금 더 아니, 많이 애쓰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늘 제게는 들립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표현들만 봐도
일치는 많이 애써야 이루어지는 것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겸손, 온유, 인내심, 사랑을 가지고 참으라고 합니다.
서로 참아 주라고 하는 것부터가 서로 불편하고, 서로 불쾌하고,
그래서 서로 힘들게 하며,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합니다.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형이고,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면,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그래서 참아야 할 것이 애초에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외 없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고,
그래서 힘들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고 서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갈리는 것입니다.
바뀌라고 요구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과 사랑을 지닌 사람은 참을 것이고,
그것이 없는 사람 곧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내 마음에 들게 바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은,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참기 위해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이 바탕이 된 사랑을 지니려 애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른 곳, 곧 코린토 전서의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며(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지요.
이런 것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실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이것을 우리는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모든 것이 내 맘에 들도록
다 좋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려 애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시는 일치를 얘기합니다.
평화의 끈?
끈은 하나로 묶어주지요.
그런데 불화는 묶어주지 않고 갈라서게 하니 아예 일치의 끈이 될 수 없고,
당연히 평화라야 하나로 묶어주는 일치의 끈이 되는데 제가 보기에
이 평화도 성령의 평화여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내 맘에 들기를 애초부터 바라지 않고,
사랑의 성령은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기에
우리는 사랑의 성령으로 평화롭게 일치를 이룰 수 있겠지요?
바자회와 관련해서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자회를 8시에 끝마치는 것으로 공지되었는데
이웃의 불평도 있었고,
봉사자들도 그때까지 봉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이 파악되었습니다.
그래서 6시에 바자회는 접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무리를 위해 봉사해주실 형제님 계시면 많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