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의 날은 시성 되지 않은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인데
올해 저는 이 모든 성인이 바로 숨은 성인들이라는 묵상을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을 한 성인들이고,
사람들에게는 그 성성이 드러나지 않은 성인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은 왜 숨은 성인들이고,
왜 이런 묵상을 제가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늘 독서 묵시록을 읽다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고,
저나 여러분이나 숨은 성인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 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들은 먼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뽑혀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고,
다른 모든 민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와 그 수를 다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순교자들을 보면 성인품에 올라 그 이름과 수를 알 수 있는
103위 성인이나 순교자보다 무명 순교자들이 더 많고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순교하지 않았어도 박해 때 신앙을 간직하며 숨어 산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무명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른 순교자들보다 성덕이 부족하지 않다고.
그리고 박해를 피해 숨어 산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안에 숨은 성인들이라고.
지난여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할 때 ‘공근’이라는 지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그 마을의 형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박해를 피해 홍성에서 온 가족이 거기에 눌러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매우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가족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곳에 온 거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하느님 안에 숨은 분들입니다.
사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분들이 많고,
우리 재속 프란치스코회만 봐도 이사를 했으니 다른 형제회로 가라고 해도
거기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다니던 곳에 계속 머물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 관계를 끊은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은 그래서 현실 도피의 삶이 아니라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의 삶이고
그래서 성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회개의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재의 수요일에 듣는 복음이 있지요.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이런 묵상을 하고 나니, 숨은 성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아파트가 아닌 옛날 우리 시골집 안 마당에 내가 있습니다.
문을 닫아건 고요한 우리 집 안마당에 햇빛이 들어오는데
내가 그 나만의 볕을 쬐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밀양密陽을 쬐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숨은 성인들의 삶은 밀양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