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위령의 날에는 세 차례 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두 번째 미사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핼로윈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 모두에게 주님께서 안식을 주십사는,
영원한 안식을 주십사는 마음이기에 두 번째 미사의 복음을 택한 겁니다.
지난 월요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들에게 줘야 할 위로는
우리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위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이들은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신 대로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것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건네는 위로도 있어야겠지만, 우리의 위로는 한계가 있기에,
특히 이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는 우리의 위로가 직접 전달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느님 손에 있기에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저는 요즘 추세를 걱정스러워합니다.
위령미사를 드리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 말입니다.
제가 사제로 서품된 30여 년 전만 해도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많았는데
요즘은 생미사가 훨씬 더 많고, 생미사도 자녀들을 위한 미사가 대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가운데서 효도는 구닥다리로 치부되고,
치사랑은 실종되고 내리사랑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는 입 싹 닦고 되돌릴 줄 모르고,
손주는 봐주면서도 부모는 노인 요양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우리 신앙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자녀를 위한 생미사는 자주 바치면서,
부모를 위한 연미사를 자주 봉헌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고 자주 찾아가지 않는 것처럼,
부모를 하느님께 맡기고 돌아가신 날 한 번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의 문제는 하느님 사랑에도 해당됩니다.
부모를 향하지 않는 사랑은 하느님께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기만 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줄은 모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드려 하늘이 비를 내려줬는데 감사제를 올리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는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은 사랑의 영원한 미성숙입니다.
나의 사랑이 성숙해지면 이제 받기만 하지 않고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어린애처럼 그저 받기만 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의 성숙한 사랑과 성숙한 신앙은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사랑에
산이와 죽은 이의 영혼을 맡기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사랑,
곧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다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