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첫째 독서의 첫 마디가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이고
이어지는 말들도 온통 ‘기쁨’, ‘환호’, ‘환성’ 같은 매우 희망적인 말들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늘 우리도 기쁨에 대해 생각게 되고,
우리의 기쁨은 어떤 기쁨이고 어떤 기쁨이어야 하는지도 생각게 됩니다.
기쁨은 첫째로 소유적 만족감입니다.
갖고 싶었던 컴퓨터를 갖게 되었을 때 기쁘지요.
둘째로 성취적 만족감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추진 중인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 기쁩니다.
셋째로 인격적 만족감입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거나 기다리던 손자를 얻었을 때 기쁩니다.
기쁨이 이렇게 몇 가지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꿈, 희망,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갖거나 이루거나 만나기까지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 중의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기쁨이 더 크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이 생겼는데 집을 갖는 것이 오랜 꿈이 아니거나
꿈이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갖게 되면
그 기쁨이 오랫동안 고생고생한 끝에 산 것에 비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쁨을 추구합니까?
돈을 얻는 기쁨과 사람을 얻는 기쁨이 있는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구원을 얻는 기쁨과 치유를 얻는 기쁨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병이 낫는 기쁨과 현존 체험의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기쁨을?
다른 말로 하면
소유의 기쁨과 성취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성취의 기쁨과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인간 사랑의 기쁨과 하느님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대리 만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만족을 대신하는 만족을 일컫습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다가 비만이 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기쁨에도 대리 기쁨이 있습니다.
상위의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하위의 기쁨에 주저앉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저앉습니다.
사랑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성취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천상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 기쁨에 주저앉습니다.
구원의 기쁨 대신에 성취나 치유의 기쁨으로 만족합니다.
구원자가 오시길 기다리지 않고 손자가 오길 기다립니다.
스마트 폰 화면에 성화가 있지 않고 손자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는 기쁨은 인격적이면서도 성취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써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기쁨이요,
구원자를 만남으로써 원하던 구원이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사야의 이 예언이 주님께서 오심으로 성취됨을 얘기합니다.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보내어 주님이 그 메시아인지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지는 말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께 희망과 사랑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의심치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도 바흐의 칸타타(가톨릭 성가 180번), ‘인간의 희망이요 기쁨이신 예수’
이 성가를 들어보시길 추천하며 오늘 강론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