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공현의 신비 ( 관계 안에서 안전과 온화함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 )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말씀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림으로써 도구적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손에 맡겨진 성모님의 자유는 하느님의 내적 생명이 흐르는 통로가 되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38)
성탄과 공현의 신비는 말씀의 육화와 육화된 말씀의 현존이 드러난 위대한 신비다. 하느님의 내적 생명이 흐르는 통로는 말씀을 받아들인 우리들의 관계가 되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이 위격적 관계성 안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관계를 변모시키는 생명의 에너지로 자리를 잡게 하는 핵심적 신비를 경험하도록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에서 신적 에너지를 발견하게 되면 거기에 머물러 쉬고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기도하면서 경험하게 된다. 하느님과 나, 너와 나,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평범한 일상의 관계 안에서 주님의 육화와 공현의 신비를 발견하도록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관계 사이에서 부드럽고 온유한 에너지가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침대를 마련해 놓아도 아이들은 침대로 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엄마와 아빠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안전과 온화함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이며,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 관계성 안에서 쉬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오가는 신적 에너지를 성령 안에서 발견하고 그 안에서 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요한 1,35-41)
우리는 여기서 세례자 요한, 안드레아, 시몬, 필립보, 나타나엘이 어떻게 예수님을 발견하는지 보게 된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 이 질문을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계신 것이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공간을 보라고 그들에게 친밀한 초대를 해 주셨다. 하느님의 환대가 작용하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 공간을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에 관하여 질문하신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과 더불어 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수께서 스승,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발견해 간다.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를 잇는 사다리가 되어 우리의 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확장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의 쉼의 시간은 메시아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묵으면서 그분이 얼마나 다정하고 온유하신 메시아이신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허물어진 관계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친 나이다. 내가 만든 단절의 장벽들이 흘러들어 오는 신적 에너지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만든 독점과 소유와 꼭대기에서 휘두르는 지배의 칼들이 상처를 주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안전하게 쉴 곳을 찾지만, 관계 안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한다면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 사이에서 쉴 공간을 만드는 몫은 하느님과 연결된 이들에게 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38) 도구적 존재로 내어드린 나의 자유가 관계성 안에서 쉴 자리를 만들도록 한다면 성탄과 공현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