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주 목요일-2021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히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저도 마음을 주제로, 완고한 마음과 가엾은 마음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마음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고 특히 근자에 와서 심리학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가히 심리학 전성시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심리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학자들 이론에 크게 관심두지 않기에 마음에
대해서도 제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는데 그 거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란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종합적인 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말이나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유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고,
이것에 영향을 주는 것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육체도 영향을 주고, 욕구도 영향을 주고, 정신도 영향을 주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뭔가 결핍을 느낄 때
욕구가 생기는데 이 욕구에 이성이 반대를 하더라도 감성이 강하게
작용하면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고, 욕망이 생겼다 하더라도 의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욕망으로 그치지만 의지가 동의하면 욕심으로 발전하지요.
그런데 육체나 본능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이 있는데
어제 이미 얘기한 바 있는 영성 생활이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영을 추구하는 것이 영성 생활이라는 것은 어제 말씀드린 바입니다.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신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영/정신에는 육의 영과 주님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육체와 본능을 따르는 썩어빠진 정신이란 것이 육의 영이라면
고귀한 정신은 육체와 본능을 따르거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치 않고
초월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거라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기도와 헌신의 영/정신은 성령과 교감하는 정신이라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와 헌신의 영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마음이 민감하게 되어
오늘 히브리서가 인용하는 시편 말씀처럼 오늘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흘려듣거나 목석과 같이 듣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늘 깨어있을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라는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민감하지 않고 완고하다는 것은 아예 아무 말을 듣지 않는 것도
포함하지만 옛날얘기만 간직하고 오늘 듣지 않는 것도 포함키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 말만 기억하고 오늘 들리는 말에 무디기 쉬운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정확히 똑같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하느님 말씀에만 민감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처지와 필요 특히 아픔과 고통들에 대해서 민감해야 하는데
이웃의 아픔과 고통들에 민감함이 바로 가엾은 마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심코 지나친다는 우리말이 있는데 이 무심하다는 말을 뜯어보면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있다면 그런 사람 무시무시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무심한 사람이 꽤 있습니다.
모든 일에 무심한 사람도 있고 귀찮은 일에만 무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곧 아프리카 난민 돕기 광고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것처럼 또는
전기의 퓨즈를 끊듯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는 사람인데
나는 어떤 사람, 마음이 없는 사람인지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