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왕실 관리의 아들이 치유되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백인대장의 종이 치유되는 얘기와 같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 루카 복음의 백인대장은 이방인이고
오늘 요한복음의 왕실 관리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들이 치유되고 종이 치유되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치유를 청하는 사람과 치유해주시는 주님,
이 두 당사자의 서로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둘 다 아들 또는 종의 치유를 청하지만
백인대장이 감히 자기 집까지 와달라고 하지 못하는데 비해
왕실 관리는 자기 집까지 와서 직접 치유해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대단한 믿음의 백인대장은 칭찬하지만
왕실 관리에 대해서는 불신적인 태도를 꼬집으시며
와 달라는 청도 거절하고 믿고 가면 치유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고
주님께서 왕실 관리의 불신을 꼬집으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왕실 관리의 믿음이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청함에
주님께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답하시니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고
복음은 기록하고 있고 치유가 이뤄진 것을 보고는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믿음이 부족한 것일 겁니다.
이는 우리와 비슷하지요.
우리도 주님을 믿지만 그 믿음이 많이 부족합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왕실 관리처럼 표징과 이적 체험을 바라는 면에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들이 살아날 거라는 말씀을 믿고 떠났을 때의 믿음과
아들이 살아난 뒤에 그와 그의 가족이 믿게 된 그 믿음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둘 다 믿었지만 체험 전의 믿음은 그럴 수밖에 없는 믿음이라면
체험 후의 믿음은 우러나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는 희망적인 믿음과 체험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우리 인간은 너무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믿게 되지요.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 이성적으로 지푸라기를 믿고 붙잡겠습니까?
이것이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는 것이고,
그러기에 아직 완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면 절박한 상황만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황이 믿게 한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진정 믿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은 그러므로
희망적인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한 뒤에야 생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믿음이 아직 희망적인 믿음이고
불완전하고 나약할 지라도 너무 실망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망한다는 것은 아직도 교만한 표시이니
실망하기보다는 믿음이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확고하고 완전한 믿음을 주십사 청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