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은 똑같이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류의 조상과 주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인류의 조상이 유혹을 받아 하느님처럼 되려다가
죄를 지었다고 전하는 데 반해 복음은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탄과 그 유혹을 물리치고 죄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대조적으로 전합니다.
이런 대조를 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았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떠올리며 우리도 인류의 조상처럼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자는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인류의 조상은 하느님처럼 눈이 열리는 유혹에 넘어간 데 비해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유혹을 연달아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다운 선택을 하셨는데 우리도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주님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묵상을 또한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눈이 열려야 한다면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 열려 빵이 아니라 말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빵을 보는 것은 눈이 열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고 저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눈앞에 있어 눈을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빵을 보고도 그 너머의 말씀을 보려면
너머의 것을 보려는 의지와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보려는 의지는 내가 지녀야 하지만 볼 수 있는 능력은 주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주어져야 하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처럼 유혹을 받기 전에 요르단강에서 세례와 성령을 받고는
성령의 인도로 유혹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가서 단련까지 받아야 합니다.
사탄과 유혹으로 단련되는 기간이 40일입니다.
이 기간을 덜 채우면 안 됩니다.
덜 채우면 덜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이 기간엔 천사의 시중을 받으라고 사탄이 유혹해도
천사마저 시중을 들지 않고 그 시중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산꼭대기에서 세상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를 경배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으시고
하느님 나라를 올려다보시며 하느님께 경배합니다.
산꼭대기까지 가서 세상을 내려다볼 일이 뭐 있습니까?
세상 영광을 소유하려면 세상 가운데로 돌진할 것이지
세상을 떠나 뭣 하러 산꼭대기까지 애써 올라갑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처럼 세상을 떠나 광야로 가고,
산꼭대기를 오르더라도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도록 합시다.
사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유혹을 주신 하느님을 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