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지금까지 저는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니라고 많이 말해왔습니다.
복음의 악령들도 주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괴롭히려고 왔냐고, 그럴 것이면 제발 떠나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잘 알지만, 거부하고,
하느님 뜻을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그런 앎은
오히려 아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기에 그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서는 하느님을 알자고, 알려고 힘쓰자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은, 하느님을 잘 알려고 힘쓰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면 잘못 믿게 되고 시작부터 믿음이 잘못되겠지요.
복음을 보면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예를 주님께서 몸소 들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잘못된 하느님 이해입니다.
하느님을 모질고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으로 그는 이해하잖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두려워 피하기만 할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는커녕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또 드시는 예가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바리사이는 자기를 자랑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잘못입니다.
나쁜 짓은 하지 않고 교회 의무를 다하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께서 그걸 좋아하실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은 겸손과 사랑입니다.
단식과 십일조가 아닙니다.
단식과 십일조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만족이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렇잖습니까?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합니까?
누가 자기 자랑이나 하러 제게 오면 저는 당장 쫓아낼 겁니다.
꼴불견이어서 쫓아내기도 하겠지만,
저를 사랑하거나 만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저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기 위해 온 것이기에 쫓아낼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은 다 잘 아십니다.
하느님은 나를 샅샅이 다 아시고 내 속마음까지 아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심을 잘 알고 자기의 참모습도 아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이
당신에게 바치는 십일조가 아니라 이웃 사랑이고
그러므로 이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십일조는 하느님 사랑의 십분의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십분의 일을 되돌리는 사랑이지요.
이는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십분의 일만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로 하느님께서 미역국 끓여 드시겠습니까?
하느님께는 십일조가 필요치도 않고 그러니
그 십일조를 이웃에게 돌려주는 것을 더 원하실 겁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선물하는 것보다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형제간에 경쟁하며 싸우지 않고 사랑하는 것,
이것을 모든 부모가 더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드리는 것,
그 사랑을 알기에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알라고 호소하는 호세아서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