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어제 미리 읽고 오늘 강론 주제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로 잡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사실 이 주제는 올해뿐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되는 주제인데
오늘 새벽 일어나자마자 탁 떠오른 생각이
‘치유될 때까지’, ‘회개할 때까지’ ‘구원받을 때까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늘 저의 기도에는 임종을 앞둔 분, 수술을 앞둔 분을 위한 기도도 있는데
어제는 어떤 분이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걱정하고 기도하다 잠이 들었기에 일어나자마자 그분 생각이 났던 겁니다.
그러면서 옛날 어떤 기업 광고 문구,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인지
‘고객이 오케이 할 때까지’인지 모르지만, 그 광고 문구가 생각나면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육신이 치유되고, 죄를 회개하고,
더 나아가 영혼이 구원받을 때까지 사랑하실 거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예전 저의 강론에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주로 제자들이 배신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싫다고 떠나가도
아버지가 작은아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는 주님 사랑, 거기에 초점을 둔 것이었지요.
그러나 올해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
주님이 아니라 제자들의 상태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회사의 노력이 기준이 아니라 고객의 감동이 기준인 것처럼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은 작은아들이 돌아올 때까지이고,
주님의 끝없는 사랑도 도망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참 제자가 될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전에 제가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 초점을 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사랑,
아니 저의 사랑이 자주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의 사랑이 무시될 때,
나의 사랑이 부담스럽다고 할 때,
더욱이 나의 사랑을 배신으로 응답하고, 흔히 얘기하듯 배은망덕할 때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포기할까, 그래서 그를 위한 기도를
이젠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드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래서는 안 되지’ 하고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그것이 실은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 사랑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가 더 큰 이유이니,
저의 사랑은 진정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함이 정직합니다.
사실 그에 대한 저의 사랑은 이미 정나미가 떨어졌거나
적어도 전보다 현저하게 식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저의 사랑에 비하여 주님의 사랑은 진정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우리가 구원받을 때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당신께 돌아와 당신 사랑에 머물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당신 사랑의 표시로 성체성사를 세워주시고,
이 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을 기억하고 당신 사랑에 머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드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에는 강론을 올리지 않습니다.
부활 대축일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