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해 주시기를 기도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인가?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이라는 신에게 뭔가를 호소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기도의 말을 건네왔습니다. 상을 받거나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또 우리의 목적 달성을 위해,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말을 듣게끔 부탁을 넘어 강요하듯이 기도해 왔습니다. 기도의 숫자와 재물과 희생을 셈하면서 많이 바치면 많이 받고, 적게 바치면 적게 받고, 아무것도 바치지 않으면 하나도 받지 못한다고 여기면서, 내가 바친 크기와 양에 따라 주셔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마치 나의 노력과 정성과 힘으로, 나의 업적과 공로로 하느님을 통제하려는 듯 기도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반대쪽으로부터도 모든 이야기를 들으셔야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자기 편이 이기기를 원하고 반대편에서도 자기들이 이기도록 기도합니다. 모두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굽신거리며 그렇게 해 왔습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내 손에 들고 있는 한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승패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가진 주도권을 하느님께 내어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자비와 선이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 살펴보면 기도는 상호성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 맺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도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이라기보다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바라고 계신지를 살피고 성령의 열매들, 곧 바오로 사도가 열거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않는다면 나의 기도는 겉에만 맴도는 허공에 떠 있는 말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하여 오늘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이 호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관계성 안에서 필요성을 발견하고 그 필요를 채우도록 하는 “내어주는 몸”의 구체적 움직임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움직이시어 관계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의 현존과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경험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요한 15,16)
썩지 않는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이러한 열매들을 맺는 것과 관계가 없는 기도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썩지 않을 열매로써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죽음 없는 부활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고,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의 기도를 바칩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기도와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이를 말해줍니다. 두 분 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하느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초대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의 관계 속에 들어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마리아, 육신, 모태, 인간성을 가진 나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예”라고 대답하는 나의 자유로운 동의를 원하십니다.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할 때, 주님의 거룩한 영의 활동이 나를 통해 관계 안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로, 모든 피조물로 확산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과 같은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당신이 저를 통해, 제 안에서 결정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하는 절대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입니다. 역사의 예수 안에서 믿음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나의 자유와 나의 의지를 하느님의 손에 내어드리는 구체적인 믿음의 현장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움직이도록 이끌어주는 영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거래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도를 거래처럼 하고 있는지, 그 실상이 너무나 어둡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무지의 구름 같습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느님께 미루고 오로지 계명 준수와 희생과 기도문에 의지하여 숫자를 셈하면서 이를 반복하고 있는지 이것이 아버지의 고통과 슬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원형을 바라봅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격적 선의 흐름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또 얼마나 내가 그분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깊이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흐름 안에서 살아가도록 나도 내어주는 몸으로서 선에 참여합시다. 썩지 않을 열매가 맺어지도록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드립시다.
“아버지께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에 손에 맡기셨다.” (요한3,35)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으신다.” (요한 8,2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30)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요한 12,45)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4,20)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요한 16,15)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16,32)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4)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5) “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나의 것입니다.”(요한 17,1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21)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2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26)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도록 해드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너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발견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활동을 간직한 이들이 바치는 관계의 혁명을 불러오는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