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인데
교회 전례는 스바니아서 말씀을 보통 첫째 독서로 쓰지만
로마서의 말씀도 오늘 독서로 쓸 수 있도록 배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독서로 쓸 수 있게 한 뜻은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추측하는데
그것은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유가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는데
제 생각에 최고로 기쁠 때 생각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마찬가지로 최고로 슬플 때 생각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누가 기뻐할 때 같이해주는 사람이 그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고,
슬픔을 같이해주는 사람이 그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기쁨을 같이해주는 것보다 어쩌면 더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거나,
미워하거나 경쟁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결코, 기쁘지 않거나 더 나아가 시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무튼,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아이를 갖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해 주기 위해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이 틀림없는데,
이때 성모 마리아가 정작 자신의 잉태를 기뻐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보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리려고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마리아께 얘기한 것을 보면 성모 마리아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데도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겁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은 방문이 아니라 축복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신적 사랑입니다.
둘에게 오신 하느님의 방문을,
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둘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구원을 서로에게 확인하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을 함께하려는 그 초월적 사랑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제가 이렇게 의미 새기게 된 것은
어제 한 분이 세상을 떠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제가 알 때부터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안타까워 그때 이후로 기도해 드린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병문안을 자주 가지 못했고,
재발해 이제 어렵겠다는 얘기 또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에도
방문해야지 생각만 하고 방문하지 못했는데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고,
가장 힘들었을 때 손을 잡아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튼,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에,
기뻐하는 사람과 같이 기뻐해 주는 사람,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더더욱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
더 나아가 방문으로 그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