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막 예리고를 떠나려고 하십니다.
공관복음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에서 공생활을 마무리하시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을 앞두고 있는 마지막 도시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마르코복음에는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마태오복음에서는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메오가
예수님을 부르는 이름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환호하지는 못합니다.
눈이 멀어서 고통 중에 있기 때문에
환호보다는 원망이 더 강하게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그의 말에서
그가 전에는 볼 수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눈멀음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기에
그가 예수님께 청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판단하여
예수님께 청할 자격도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예수님께 의지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혹시 나에게 죄가 있어도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그를 볼 수 있게 만들었고
그는 이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게 됩니다.
고통의 상황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찬양은 감사에 대한 반응으로
의지적으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사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히려 고통의 상황에서는
하느님께 따지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것으로 하느님과 관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은
우리에게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고통의 상황에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머무를 때
우리의 원망도 환호와 기쁨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