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명사이고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오늘도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전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믿음의 새로운 차원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믿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믿지 않고 살 수 없고,
다만 어떤 믿음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다를 뿐이라는 점 말입니다.
우선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거나 안 계신다고 믿는 것일 뿐 다 믿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믿든 나쁜 사람이라고 믿든 다 믿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가능성을 믿든 불가능성을 믿든 믿는 것이며
다만 불가능성을 믿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시작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성을 믿을 것인가, 불가능성을 믿을 것인가 늘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을 때도 이 관점에서,
그러니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거나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무슨 하느님입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을 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을 믿을 때는 거짓이 없이 진실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좋으신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악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하느님이 무슨 하느님입니까?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은,
늙은 그에게서 수없이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며,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믿은 것이고,
나쁜 건 주지 않고 좋은 것만 주시는 하느님
곧 사랑의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믿기로 선택했지만
이 선택에서 더 필요한 것이 체험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과 사랑 체험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도 믿은 아브라함이 신비경을 체험하는 얘기를 전합니다.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하느님 현존 체험과 사랑 체험이 처음에는 그저 황홀경만이 아닙니다.
공포와 암흑을 먼저 체험하고 그 후에 황홀경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도 그저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먼저 끔찍한 고통과 그로 인한 두려움 체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해 질 무렵 공포와 암흑을 체험한 아브라함은
이내 하느님께서 타오르는 횃불로 오심을 체험합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구약에서 하루의 시작이 그 전날 저녁인 이유가 이것이고,
우리의 대축일이 제 1저녁 기도부터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반드시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