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늘 식당 건너편에 하릴없이 모여 담배 피고 떠들고 하는
조선족 남자들에게 가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오는데 지나가던
동네 어른이 저에게 ‘쟤네들한테 잘해주지 말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데, 그 조금도 잘해주지 말고 냉대하라는 말이지요.
왜 그러는지 말하지 않아도 제가 알지만
그 말을 듣고 제가 ‘그래도 잘해줘야지요.’라고 대답하고는 더 생각했지요.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가 뭔가?
내가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세운 이유가 뭔가?
내가 <여기 밥상>을 하는 이유가 뭔가?
우리 조선족 형제들을 포함하여 다 여기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해 나도 여기에 온 것 아닌가?
‘여기’가 지금 내 존재 이유이고 온 이유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설사 여기에 와 있는 이주민들이 아무리 밉상이어도
저는 그들을 위해 왔기에 그들은 제 존재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 존재 이유로 삼은 것은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당신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이런 행위를 못마땅해합니다.
왜 그들을 자기들처럼 냉대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하느냐는 거지요.
이에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게 합니다.
하나는 사랑의 존재 이유입니다.
엄마는 아기가 없으면 엄마도 아닙니다.
스승도 제자가 없으면 스승도 아닙니다.
의사도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아닙니다.
스승은 말썽꾸러기도 사랑하고 그를 올바로 이끌 때 훌륭한 스승이고,
의사도 환자가 난치병 환자일수록 그를 고쳐 줄 때 명의라고 하는 법입니다.
사실 사랑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서 돈만 아는 선생이나 의사라면 말썽꾸러기 학생이나
돈은 안 되고 치료하기 까다로운 환자는 포기하거나 배제할 것입니다.
사랑할 때 너는 나의 존재 이유이고,
너 없으면 나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욕심의 사람은 내게 필요한 사람만 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님 말씀이 또 생각게 하는 것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이고 죄인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겸손한 죄인과,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우리 모두를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
겸손한 죄인은 오늘 세리와 죄인들처럼 그 부르심을 따르고,
교만한 죄인은 오늘 바리사이처럼 주님을 비판하고 따르지 않겠지요?
이것을 오늘 묵상하는 겸손한 죄인인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