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즈카르야서는 우리의 임금님께서 오시니 기뻐하고 환성 올리라 하는데
그 임금님이 어떻게 오시고 누구에게 오시는지
오늘 연중 제14주일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 임금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왜 그렇게 오시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렇게 오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 오시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오시면 많은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데 왜?
그것은 주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긴 하지만
낮은 곳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 군림하시고 당신을 과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아지려고 오시고 우리를 고통에서 구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에 대해서 필리비서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는 겸손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겸손의 사랑은 같아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기를 사랑하는 어미의 사랑 같습니다.
어미는 아기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 키를 낮춥니다.
아이가 알아듣도록 아이의 말로 말하고 아이의 수준이 됩니다.
이렇게 낮추시고 우리와 같아지시니
우리는 주님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겸손으로 당신을 숨기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당신을 숨기십니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에게 감추시고,
오히려 고생과 무거운 짐으로 한껏 낮춰진 사람에게만 보이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같아지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은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라고 하시며 우리를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누가 이 초대에 응해 가겠습니까?
고생이나 무거운 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은 가지 않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만 가겠지요.
그렇지만 주님께 가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간다고 해도 주님께서 짐을 내려주거나 덜어주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에게서 짐을 지는 방식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짐 지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겸손과 온유의 멍에로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멍에는 배낭과 같이 짐을 싣기 편하도록 만든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멍에는 기본적으로는 불편한 것이고,
그나마 덜 불편한 멍에와 더 불편한 멍에가 있을 뿐인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멍에 곧 겸손과 온유의 멍에는 왜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왜 무거운 짐도 가볍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사람이 짐을 무겁게 지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예 아무런 짐도 지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작은 짐도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람은 짐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거운 짐을 질 각오도
되어 있기에 그에게는 어떤 짐도 늘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운 짐일 것입니다.
주님 친히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지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생각하며 내 십자가를 지면 짐이 가벼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