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은 ‘양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이리 떼와 같다’고 하시지 않고 간단히 “이리 떼”라고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단지 제자들의 온유함 때문에 다시 말해 그들이 본성으로는 사람이지만 온유함으로는 양이므로 그들을 ‘양’에 비유하셨다면 그들도 본성으로는 사람이나 잔혹함으로는 이리들과 같으니 그들을 ‘이리 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전자는 양과 같다’고 하시고 후자는 ‘이리 떼와 같다’가 아니라 한마디로 “이리 떼”라고 하신 이유는, 하느님의 창조물인 사람은 아무리 선한 이라 할지라도, 육에 따른 악한 것이 그 안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선할 때는 양이라고 불리지만, 사람이 완벽하게 선할 수는 없으므로 양과 ‘같다’고 표현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이리와 같다’가 아니라 ‘이리’ 라고 불립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안에 선한 것을 하나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관해서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46. 구세주 예수
루카 복음사가는 구원자 예수님을 조금 달리 생각한다. 예수께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 이 곤경은 바로 소외와 내적 괴리감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산다. 헛살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을 체험함으로써 삶에 성공하는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몸소 이 길을 가셨다. 에수님에게서 참되고 공정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삶을 한 편의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이 연극은 예수께서 죽는 순간 절정을 이룬다. “(이 연극을) 구경하러 몰려온 군중도 일어난 일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루카 23,48),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진정한 휴머니즘을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이 보인다. 이 신적 연극을 바라보는 사람은 변한다. 가슴을 치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삶과 사랑의 신비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루카 복음사가는 우리가 세상에 나가 세상을 꾸려갈 수 있도록 예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주신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이 변화되고 구원과 해방을 이루는 예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스며들어 변화하기 시작했다.(215)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7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로마 14-16장 / 갈라 1-3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아낌 주간 :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감사에 대한 강론
풍족함과 만족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와 반대로 고통 속에서는 기도하기보다는 불평하기 십상이다. 외적으로 다가오는 큰 고통은 우리 각자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요구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누구든 감사를 드려야 할 의무에서 벗어 나와 있어도 되는 것일까? 감사한다는 것은 내가-좋은 상태에 있든 나쁜 상태에 있든 간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입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나 역시 죄와 부담과 더불어 기쁨과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야고 1,17). 그러므로 모든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사는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잘못되고 부족한 모든 것,고통스럽고 어두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이 옳다.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온 숙명에 대해 호소하고 울부짖을 수 있다. 그 짐과 고통을 견디어 나가는 것은 너무나 힘에 겹기 때문이다. 욥도 끝에 가서는 그리스도인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어떤 사람이, 욥이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 1)라고 한 기도에 동참한다고 해서 그가 감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바실리오가 고통과 곤궁은 오직 몸에만 이를 뿐 “영적 영혼”에게는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이원론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가 “영혼”이라고 한 말은 “내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내적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시련과 고통들을 극복해 낸다.(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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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TP(Ecology Maria Theotokos Platform)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