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어제는 제 방에서 키우는 꽃 화분을 창밖 작은 턱에 내놨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잔디밭 민들레는 바람도 쐬고 햇빛도 쬐는데
제 방의 꽃은 햇빛도 바람도 어쩌다 한 번
제가 인심을 쓸 때만 맛보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정말 제가 그랬습니다.
창밖의 민들레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온 잎새로 맞는데
제 방의 꽃은 형편없는 저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못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더 펼치니 그 꽃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 꽃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민들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니, 쯧쯧.
그리고 생각은 저의 무딘 감각으로까지 뻗어나갔습니다.
소리에 대해서는 그렇게 감각이 예민한데
사랑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감각이 무딘지!
늘 내 곁에 계시고 늘 내 안에 계시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저는 불감증 환자처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내 곁에 그리고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기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주님의 말씀을
당시의 제자들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하신 말씀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아는 것이듯
믿음이란 오감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리는 감각이 있으니 다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감각이 있다고 다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이 살아 있어야 느낍니다.
감각을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감각이 죽고,
감각을 다른 데 쓰면 역시 감각이 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고 늘 함께 계시는 현존을 느끼려면
이 죽은 감각을 살리고, 무딘 감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리고 어떻게 일깨웁니까?
특히 영적인 감각을 어떻게 살리고 일깨울 수 있을까요?
우선 기적으로 감각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것에서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니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
곧 기적을 통해서 일깨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조용히 있거나 말하니까 다른 데 시선이 팔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해
또는 너무 교만한 사람의 굳어진 감각을 깨부수기 위해
우레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않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러므로 바람직한 것은 사랑으로 감각을 일깨우고 예민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감각이 가 있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감각을 허비하지 않고 하느님께 쏟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주의 기도 풀이”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매사에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생각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힘과 영육의 감각을 다른 데에 허비하지 않고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침으로써 힘을 다해 당신을 사랑케 하소서.”
그렇습니다.
사랑은 감각을 일깨우고 살아있게 하고
믿음은 사랑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오늘 하루 저의 감각이 천 개의 손인 듯
사랑으로 하느님 현존을 느끼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