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내어줌을 배우는 영성
꽃은 꽃으로써 만족하고 향기를 내어줍니다. 나무는 나무로써 만족하고 잎과 열매와 몸 전체를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개와 고양이와 알을 낳는 닭들은 저마다 자기 몫을 다하여 자신을 내어줍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의 창조주를 마음껏 찬미하며 창조의 목적에 따라 자신을 내어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내어줌이 모든 것을 살아있게 하고 숨 쉬게 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 다른 피조물처럼 자기 몫을 살지 못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자신으로 만족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행복을 거부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차별하고, 판단하고,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고 꼭대기에 앉아 자격을 부여하기까지 해왔습니다. 무상으로 주시는 사랑에 행복하기보다 죗값을 계산해야 한다고 하면서 보속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저마다 자기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피조물을 보아서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월감 속에서 저지르는 인간의 자만심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죄라는 빚문서를 들이대면서 어떤 빚을 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합당한지, 필수적인 예식이나 성취해야 할 목표들을 정해놓고 시험을 보듯이 그렇게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취가 하느님의 뜻인 양 가르치면서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희생을 강조하고 온갖 형태의 틀을 만들어 냅니다. 경직되고 우울하고 불안한 얼굴로 많은 시간을 예배에 허비하면서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희생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강요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관계적 내어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아예 모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상으로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계획들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얻어낼 수가 없고 이미 우리에게 자유롭고 완전하게 주어진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내어줌을 배우는 영성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압도해 버리고 깨달음과 휴식을 그 중심에 두게 합니다. 감사와 감동을 넘어 감격과 감탄에 이르게 하는 황홀함의 신비가 온갖 형태의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내어주는 사랑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 맡긴 채 잠드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삶을 압도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업적과 공로에 따라 행동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인과응보의 틀을 모르십니다. 은하계의 티끌에 불과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거기에 자만심에서 나오는 탐욕이 있고 독점과 소유로 지배의 영역을 넓히려는 폭력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있는 곳에 계시고, 오직 우리들의 관계 안에서 발견되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신비는 우리 믿음의 중심입니다. 상호 간에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상호성 안에서 흐르는 선의 신비가 상호 간에 주고받음을 통해 확장되어 우리의 관계성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습니다. 무상성과 보편성으로 우리를 비추고 계십니다. 우리는 응답하는 믿음과 응답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