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삐딱하게 이해하면 그러니까 오해하면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만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초대치 않으시는 줄로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실 리 없으시고,
또 고생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고,
다만 주님께 가는 자와 가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인데,
그런데 주님께 가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루의 힘든 일을 끝내고 선술집에 가는 사람이나
피로를 풀기 위해 오락이나 쾌락을 찾아가는 사람이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에게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고단한 인생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사람일지라도
점쟁이나 인생 스승을 찾아갈 뿐 주님께 가지 않는 것입니다.
참 스승이요 구원자이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이 두 팔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찾아갈 주님이 있는 우리는 얼마나 복됩니까?
이는 힘들 때 찾아갈 친정엄마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주님을 찾는 이유가 잘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해 오라고 하신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 가운데 그런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안식을 주겠다고 하셨지 짐을 벗겨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어떻게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고,
그러니 그 비법을 배우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비법이 바로 주님의 멍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매고 짐을 지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가 편한 이유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짐을 거부하지 않는 마음이기에 편하고 안식을 줍니다.
그리 좋은 예는 아니지만
처음 목줄을 매는 강아지는 거부하기에 목줄이 불편합니다.
목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조이고 더 불편해지지요.
그러다가 벗어나길 체념하고 목줄을 받아들이는 순간 편해집니다.
고생이나 무거운 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생이?
왜 나에게 이런 무거운 짐이?
이렇게 거부하는 마음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거부하는데도 주어지는 것 때문에 분노하면 그 마음에는 더더욱 안식이 없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란
고생과 무거운 짐이 마땅히 내 거라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사실 인생은 고생입니다.
이걸 받아들이면 안식이 마음의 평안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