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잃어버린 사막 교부의 덕을 다시 회복하기
내 딸과 사위 그리고 두 손녀들과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았다. 식사가 끝나자 내 딸이 손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너희들은 무엇을 했던 것이 좋았니?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하느님이 주신 어떤 선물들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었니?”
손녀들은 이런 종류의 질문들을 좋아했고, (현대 긍정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들의(signature strengths)’ 꽤 긴 목록들을 이야기했다. 손녀들을 답을 들은 사위는 “그러면 겸손은 어때? 너희들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 작은 손녀 에밀리가 “겸손이 무엇인지?” 물었다. 사위는 그렇게 젊은 세대가 아니기에 컴퓨터가 정보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었다. 사위는 “그래 사전을 가져와서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볼까?”라고 대답했다. 작은 손녀가 달려가 사전을 가지고 와서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사위는 ‘겸손’ 도입부를 찾아 그 정의를 크게 읽고 물었다. “너희들은 이 설명을 듣고 누가 떠올랐니?” 손녀들과 그들의 엄마는 즉각적으로 힘차게, “할머니” 라며 나의 부인을 말했다. 사위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어때?” 그들은 머리를 흔들며, “할아버지는 아냐!”
우리가 영적인 삶에 많은 가치를 두더라도, 겸손이라는 덕은 파악하기 어려운데, 특히 할아버지들이나 남성들에게 그러하다. 우리는 매일 겸손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개인적 영적 양성이 자라는 ‘밭(soil)’이기 때문이다. 겸손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겸손 없다면, 우리는 실재 이 세상에서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실재에도 불구하고, 겸손은 오늘 그렇게 빈번히 보이지는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선출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이나, 중도라고, 혹은 진보라고 보는 이들 대부분에게) 기쁨을 주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교종의 겸손 때문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진정한 겸손은 지각할 수 있는 거룩함인데, 우리가 다른 이에게서나 나에게서 이 겸손의 영을 만날 때에 거룩함을 경험한다.
겸손이 우리 영적 여정의 중심이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지식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 겸손을 더하면 당신은 지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이 지혜에 연민을 더하면, 당신은 사랑에 이르게 되고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이것을 아는 것은 하나의 도전인데, 그 이유는 겸손은 직접적으로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기심에서 시작하거나 자기 존재감을 쫓는 것이다. 겸손은 하느님에 의해 조건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런데 이것은 겸손이 자라는 밭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이 선물을 기다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다음과 같은 방법들은 있다.
- 어떤 것에 관해 우리 자신을 타인보다 낫게, 혹은 못나게 비교한 순간들을 떠올려 보시오.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을 때, 삶은 더 기뻐진다. 그리고 겸손의 열매는 평정심 가운데 우리의 달란트를 인식하게 우리가 한 단계 성장한 순간을 알아차리게 한다.
- (우리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해도) 우리의 성공에 다른 이가 얼마나 공헌했는지 느껴보라. 어떤 성공도 진공 상태에서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
-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과 우리가 가진 바에 관심을 기울였던 때를 주의하라. 이 순간은 우리가 받은 것에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 우리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때이다.
- 우리가 다른 이를 이용하거나 경멸하거나 놀리려 하는 유혹에 주의하라.
이러한 방법들은 우리 자신과 삶을 전체적으로 투명하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몇 가지 간단한 조치들이다. 겸손은 삶을 더 맛갈지게 하며 지침없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영적 자양분이다. 또한 겸손은 건강한 자존감을 지니게 하는 심리적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 겸손은 한편으로 자기를 과대평가 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의심하게 하는 것을 피하도록 돕는다. 겸손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렌즈를 깨끗하게 하여 우리 자신이 받은 선물들을 누리도록 하며 그것을 다른 이와 조건없이 나누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우리가 받은 것을 누리며, 하느님이 다른 것들은 돌보시도록 허용한다.
첨언)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에 대해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당시 중세 계급사회에서 하느님은 높으신 분,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고백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겸손이고, 겸손의 방식으로 당신의 드러내신다는 말은 하느님에 대한 경험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과 일상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기인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묵상하며, “오 겸손의 극치! 극치의 겸손이여!”라고 외치며, 그리스도를 통한 겸손의 하느님의 선의 세계의 좋음에 잠길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비슷한 표현을 성체성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어좌로부터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십니다.” 프란치스코는 공생활 중인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서도 겸손을 읽어내며 그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을 채우도록 하며,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버지 마음으로 채워지듯이 그의 마음 또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으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자와의 만남을 그의 회개의 시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 전에, 프란치스코는 나환자를 보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두려움, 싫어함 등의 마음만이 자기 마음으로만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없애기 위해 나환자를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나환자의 결정적인 만남에서는 그 마음 안에 작게(겸손하게) 감추어진 하느님 마음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작은(겸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큰 마음이 아니라 작은 나와 함께하는 하느님 마음을 선택합니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실재를 만나게 됩니다. 그동안 그렇게 쓴맛으로만 여겨졌던 것이 단맛으로 변하였습니다. 관계성 안에서 죽음만을 경험하던 나환자가 생동감을 얻게 되고, 프란치스코 또한 자기 안의 영이 살아나는 맛을 경험하였습니다. 겸손의 하느님과 하나되는 호흡과 움직임을 하면서 만났던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이런 경험 후에 그는 세상적 흐름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 호흡하고 하느님의 흐름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는 안에도 프란치스코를 움직였던 그 작은 마음은 이미 있습니다. 그 마음을 바라보며 그 마음과 하나되는 호흡과 그 마음이 나를 통해 잉태되고 낳음을 받도록 한다면, 우리 하느님의(겸손의) 세계를 만나고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