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밖을 또한 바라보기
우리는 내적 양성의 중요한 목표를 때때로 간과하는데, 그것은 다른 이에게 더 풍요롭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을 때, 우리는 쉽게 잘못을 범한다. 우리가 침울하거나 부적절하게 자기 중심적일 때, 은연중에 진실이 드러난다. 묵상과 관상은 하느님께 열려 있는 때이지, 우리 자신의 관점들이나 필요성에 집중하는 때는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관심을 가진다면 좋은 통찰과 이어지는 행동을 이끈다. 하지만 이때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건강한 자기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서 새롭고 더 위대한 방식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보도록 초대한다. 나는 깊은 충격을 받으며 이것을 배웠다.
어느 주일날, 미사를 집전하던 예수회 신부가 자기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상실한 것에 대해 공동체에 나누었다.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기에, 어머니의 마지막 날과 그 이후에 꽤 오랜 해 동안 그가 회상할 수 있었던 많은 생각들과 감정들과 경험들이 있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들과 감정들과 경험들이 떠올랐을 때, 그는 피하지 않고 그 사건들과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충분히 파악하려 하였다. 이것으로 그는 때로는 아팠지만, 그의 정직함과 열려있음은 자신과 그가 사목하는 가까운 이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특히 그들이 가장 상처받기 쉬운 어린 시절 이것을 경험한 이들에게, 유익하였다. 한 시점에 그는 침묵 기도 기간 동안 특이한 질문의 은총을 받았다고 나누었다. 이 상실에 대해 그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바라보는 대신에, 그는 자신에게 다음의 질문을 하였다.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고 그와 아버지를 남기고 떠나야 함을 안 후, 어머니는 어떻게 느꼈을까?”
이 질문에 앞서 그는 자신의 고통과 상실감에 대해 분명히 가져야할 만큼 적절한 집중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막 일어난 것에 대해 느끼는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초대되었다. 오늘, 다른 이에 대해 생각할 여유와 자발적으로 반응할 마음이 그 신부와 상호작용한 이들에게서 보였다. 그의 영적 성숙함이 자신에게 과하게 매이지 않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돌보도록 허용했다. 그러했기에 그는 필요와 배움에 그리고 다른 이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가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와 유사한 영적 성숙함을 추구하며 우리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응답의 차원에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고통이나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나누는가?
-우리는 한편으로 상처받은 기억들이나 부정적인 사건들을 부정하거나 축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적당하게 간직하며,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과 교차되는 것에 공감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과거와 현재의 슬픔이 우리를 영적으로 이끄는 곳에 열려 있을 수 있는가?
- 우리 삶에서 어려운 경험과 고통으로 인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에 대해 더 풍요롭게 공감할 수 있는가?
- 우리의 상실과 트라우마가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에 과도하게 매이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 우리에게 가까운 이나 알지도 못하는 이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어떻게 우리가 가졌거나 지금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더 감사하도록 돕는가?
우리가 자신과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 부드럽고 계속 질문을 던질수록, 하느님이 우리의 고통 중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에 다가가게 하는 그림을 더 완성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불행에 대해 서둘러 해결하려 하고 없애려 하고 넘어서려 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우리 삶과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도록 설치한 표지들을 놓칠 위험에 빠진다. 영적 지혜의 중요한 선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온전한 그림을 보는 것이다.
첨언)
저자는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서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통을 외면한 영적 여정은 좀 있어 보이지만 현실을 외면한 것입니다. 또한 나의 고통 속에만 안주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응답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저자는 나의 고통에서 시작하는 기도와 영적여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쉽게 없애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하느님 안에서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다 보면, 고통 속에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자비와 여유를 배우게 됩니다. 이 여유 속에서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으로 확장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마음은 자비로운 하느님 마음이 됩니다.
성경의 시편은 많은 탄원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편 저자와 시편을 불렀던 이들은 자기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청했습니다. ‘도와달라’, ‘잊지말아달라’, ‘복수해달라’ …. 이 움직임이 나의 움직임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으로 전환될 때, 시편을 부르던 이는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났고, 이 시점에 고통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않고 하느님이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나의 고통이 내가 바라는 대로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만남이 이루어지기에, 이제 나는 ‘나의 구원’이 아닌 ‘하느님 구원’을 노래할 수 있게 됩니다.
소리 높여 나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소리 높여 나 주님께 간청하나이다.…
그들이 제게 선을 악으로 갚고 제가 선을 따른다고 공격하나이다.
당신은 지극히 거룩하신 저의 아버지이시며,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이시나이다.
어서 와 저를 도우소서.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수난성무일도 6 중에서)